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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당 성우대율사(慈雲堂 盛祐大律師)

 

글쓴이

: 운수객   

작성일

: 2017-03-07 오후 1: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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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운당 성우대율사(慈雲堂 盛祐大律師) ~*~


    - “내가 떠나거든 계율을 스승 삼아 수행하라” -





    - 자운스님은 현대 한국불교 계율의 중흥조로
    추앙받을 만큼 평생동안 율풍 진작과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헌신했다. -



    한여름에도 매일 두터운 장삼 입고

    국립도서관 찾아 ‘율장’ 연구 매진

    1958년부터 ‘계정일치’ 수행 제창

    단일계단 확립·이부승수계제 정립

    스님의 수계 제자만 10만명 넘어…


    자운당 성우대율사(慈雲堂 盛祐大律師, 1911~1992)는 현대 한국불교 계율의 중흥조다. 율풍 진작과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자운스님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내가 열반한 후에는 계율을 스승삼아 수행하라”고 한 가르침대로 올곧게 수행하는 삶을 살았다.

    불자들에게 계율의 엄정함을 일깨우기 위해 율장을 번역 해설해 널리 알리고 스스로의 삶도 이 가르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아 후학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갖게 했다.

    스님은 또한 종단의 발전을 늘 염려했으며 화합승가를 강조했다. 출가수행자와 재가불자들이 항상 화합해 모두가 주어진 몫을 다할 때 종단의 발전, 나아가 한국불교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음을 간곡히 일러주었다. 스님은 1958년부터 계정일치(戒淨一致) 수행을 제창하고 정토경론과 문수신앙을 널리 유통했다.

    미타염불, 아미타경 독송, 미타예찬, 문수예찬을 일과로 해 매일 수행했으며 매월 8일에 방생, 아침공양은 죽으로 하고, 오후불식을 일생동안 한결같이 했다. 스님은 또한 천도(薦度)의 수법(修法)과 아울러 지장청(地藏請)과 지장공양문을 엮는 등 여러 가지 방편으로 대중을 애호(愛護)했다. 그런가하면 스님이 일러주고 몸소 실천한 참법(懺法)수행은 오늘에도 실행되고 있다. <자비도량참법>을 간행, 유통한 스님의 뜻에 따라 해인사 홍제암, 부산 감로사, 석남사, 서울 진관사, 수원 봉녕사, 문경 윤필암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여법히 수행하고 있다.

    자운스님은 남방불교와의 인연도 깊다. 일찍이 대만 태국 미얀마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 남방불교성지를 순례, 현지 고승들과 유대를 돈독히 했다. 한국불교계에 비구·비구니의 수계법인 이부승수계제(二部僧授戒制)를 여법히 하고 남방불교계에 비구니교단을 복원시키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자운스님은 율장연구와 홍포에 전념하기 전에 출가수행자로서 갖춰야 할 참선 수행에도 열정을 다해 당신의 선지(禪旨)를 드러내 용성스님으로부터 전법게와 의발을 전해 받았다.

    스님이 평생 펼친 일은 후학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다. 그러나 그 모두를 요약하면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의 수행에 한 치의 게으름이 없었으며 어떻게든 불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알고 수행하도록 하는데 일생을 다 바친 어른이다.

    자운스님은 1911년 음력 3월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부친 김자옥, 모친 안동장씨의 5남으로 탄생했다. 7세부터 출생지인 진부서당에서 동몽선습을 시작으로 사서삼경 등을 수학했다. 15세 때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혜운 경윤(慧雲 敬允)스님을 만나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를 들었다.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이 불급승가반일한(不及僧家半日閒)이라(인간의 백년살이 삼만육천날이란 것이 풍진을 떠난 명산대찰의 한나절에도 못 미치는 것을).” 이때부터 점점 세속의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1927년 1월 상원사로 혜운스님을 찾아가니 스님은 해인사로 떠나고 없었다. 그 길로 부모의 허락도 없이 해인사로 달려갔다. 출가를 결심하고 팔만대장경 장경판전에서 1만배를 올렸다. 그해 2월8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혜운스님을 은사로, 남전 광언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32년 범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34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권일봉 율사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자운스님의 계맥은 일봉 경념(一鳳 敬念, 1863~1936년)율사로부터 이어진다. 이후 자운스님은 일우 종수, 동곡 일타, 가산 지관, 무봉 성우, 석엽 철우스님과 비구니 보월 정행, 원허 인홍, 법계 명성, 세주 묘엄스님에게 전계(傳戒)했다.

    자운스님은 1934년 7월 보름 해인사 선원에서 안거를 성취한 후 35년부터 울진 불영사에서 장좌불와로 6년 결사를 원만히 회향했다.

    1938년 스님은 도봉산 망월사로 용성스님을 찾아 거량한 후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청산상운보(靑山常運步)하고 백운영부동(白雲永不動)이로다. 인답수저과(人踏水底過)한데 수불착의상(水不着衣裳)이라(푸른 산은 늘상 움직이는데/ 흰 구름은 영 요지부동이네. 사람이 물속을 거닐어 봐도/ 옷이 물에 젖어들지 않네).” 용성스님은 이를 듣고 그 경지를 인증(認證)하여 곧 입실건당(入室建幢)을 허락하고 전법게와 의발을 전해 주었다.

    1939년 4월 보름부터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하루 20시간씩 백일문수기도를 봉행했다. 조국의 광복과 불교중흥의 대원을 세우고 기도를 봉행하던 중 99일 되던 날. 문수보살이 나타나 계척(戒尺)을 전해주면서 견지금계(堅持禁戒)하면 불법재흥(佛法再興)하리라는 감응을 받았다.

    그로부터 자운스님은 서울 대각사에 주석하면서 율장 연구에 돌입했다. 당시엔 율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스님은 2년여에 걸쳐 한여름에도 두터운 장삼을 입고 위의(威儀)를 갖춰 날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 卍속장경에 실려 있는 오부율장과 그 주(註)와 소(疏)를 모두 필사, 이를 깊이 연구해 율장에 정통하게 됐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가졌다. 자운스님은 1947년 봉암사결사를 성철스님과 함께 했다. 그로부터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립하고 율문을 강의하는 한편 한문으로 된 사미율의, 사미니율의, 범망경,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등과 이 책들의 한글, 번역본을 널리 유통시켰다. 종단의 전국 단일계단에 이르는 1991년까지 스님이 전계한 수계제자가 무려 10만여 명에 이른다.

    말년에는 염불왕생을 발원하고 무량수경, 정토삼부경, 십육관경, 아미타경, 권발보리심문, 정토법요, 원오선사법어 등을 운허스님 번역으로 10만여 부를 간행, 유통했다.

    1955년 불교교단 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 1956년 해인학원 이사장, 같은 해 해인사 금강계단 전계대화상, 1957년 대한불교조계종 경남종무원장, 1958년 조계종 중앙감찰원장, 1959년 밀양 표충사 주지, 1960년 해인사 주지 재임, 같은 해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세계불교승가연합 창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67년 동래 범어사 주지, 1970년 해인사 주지 3임(任), 1974년 인도에서 열린 세계평화촉진회 한국대표로 참가, 1975년 조계종 규정원장, 1976년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에 추대됐다. 1977년 대각회 이사장, 1978년 대종사 법계 품수, 1979년부터 입적 때까지 동국역경원장을 역임했으며, 1991년 3월 종단의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을 사임했다. 1992년 2월7일(음력 정월초나흘) 밤10시 입적했다.

    진성원명본자공
    (眞性圓明本自空)

    광조시방극청정
    (光照十方極淸淨)

    래여청풍소요래
    (來餘淸風逍遙來)

    거수명월자재거
    (去隨明月自在去)

    “진성은 원명하여 본래부터 공적함이여. 그 광명 청정하여 온 누리를 밝게 비추네. 이 세상 올 적에는 청풍따라 소요히 왔고, 마지막 떠날 때는 명월따라 자재히 가네.” 자운스님의 임종게다. 세수 82세, 법랍 66년.

    스님의 장례는 입적 7일째인 2월13일 조계종 원로장으로 해인사 연화대에서 다비했다. 은행만한 사리 19과, 녹두만한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작은 것은 거두지 아니하고 큰 것 19과만 수습하여 해인사 일주문 앞에 행적비와 사리탑을 세웠다.


    아랫사람 스스로 깨닫도록 경책

    - 자운스님 계율관 -






    자운대율사의 계율관은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파계와 비위를 저지르기 전에 예방하고 회유로써 교도해야 한다.

    둘째, 파계와 비위가 일어났을 때에는 대중결의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

    셋째, 불교가 흥왕하기 위해서는 본연의 임무인 수행에 철저해야 한다.

    넷째, 실추된 승단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

    자운스님은 아랫사람의 잘못에도 항상 말로 나무라기보다 당신의 행동으로 경책해 아랫사람이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피곤해 늦잠 자느라 새벽예불에 불참한 제자도 당신의 예불소리에 후다닥 깨어 일어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의 일상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정한 일과를 어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자운스님은 1966년 가을 성철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하도록 했다. 평생 도반 성철스님과 함께 해인총림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두 스님이 만날 때면 늘 종단 걱정, 해인사 걱정하는 말씀이었다. 스님은 홍제암에 머무를 때면 “홍제암 된장 맛은 제일이야. 어디가도 이런 맛은 볼 수 없어”하면서 무 나물과 된장이 전부인 공양인데도 그릇을 다 비웠다고 한다.

    평생토록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은행 예금통장 하나 없이 지내신 스님. 자운스님은 입적하기 얼마 전 제자들에게 “나는 사바세계엔 그만 오겠다”고 했다. “부고도 내지 말고 느그끼리 장례 치르거라. 제사도 지내지 말고 부도·비도 세우지 마라”고 당부했다.

    ~ 이진두 논설위원- 블교신문 - ibulgyo.com ~




~ ♪ The Melody Of Kumkangkul Song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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