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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고승(高僧) 부휴(浮休)스님 이야기

 

글쓴이

: 조계산방   

작성일

: 2016-02-07 오전 6: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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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진 고승(高僧) 부휴(浮休)스님 이야기 ~



    (1) 잊혀진 고승(高僧)

    큰 나무그늘 속에서는 다른 나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우뚝 선 거목 밑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충분한 태양열과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부휴선수(浮休善修)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주변을 돌아다 볼 때 이러한 속언(俗言)은 잘 들어 맞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부휴는 거목 밑에 자란 잡목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물을 거목화시키므로 상대적으로 그를 잡목 같게끔 왜소화시킨, 우리의 통념의 소산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어떻건 우리는 부휴대사가 살았던 시대에 서산대사(西山大師)가 한걸음 앞서 활약하였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두 인물을 비교시키고 그 어느 한쪽을 강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의 등장은 우리 불교의 중흥조(中興祖)와 같은 구실을 맡았다. 이러한 서산대사의 출현과 그 업적은 나름대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와 함께 동문(同門)의 제자로서 역시 조선대의 불교를 가름하는 부휴선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무시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부휴는 서산과 함께 부용영관(芙蓉靈觀)의 제자로서 똑같이 영락했던 조선 초기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가히 서산문중(西山門中)과 필적할만한 부휴문중(浮休門中)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산의 그늘 때문에 부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문헌에 따라서는 서산보다 부휴를 우리 불교의 정통을 이은 고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곧 송광사사적비(松廣寺寺跡碑)에 의하면 임제의 종풍(宗風)을 계승한 조선조의 고승은 부휴라고 지적하면서 서산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임제(臨濟)이래 청공(淸珙)까지 18대의 전승(傳承)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와서 태고보우(太古普愚)스님이 청공을 이었고 이후 6대의 전승이 있었으니 부휴가 곧 그 분이다’ 이밖에 송광사 개창비(松廣寺開創碑)의 기록은 위의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하면서 역시 부휴가 정통임을 말할 뿐이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에도 부휴는 응당 중요시 여겼어야 할 인물이었다.


    (2) 은둔 속의 행적

    부휴는 중종 38년(서기 1543)고대방(전북 남원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속성은 김씨였다. 부휴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다른 고승들의 탄생설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는 두류산(頭流山 :곧 지리산) 신명(信明)스님 밑에서 출가를 하고 부용영관을 찾아 그에게서 오랜 동안 공부를 하였다. 부용영관(芙蓉靈觀)의 제자가 되므로 해서 그는 서산과 23년의 연차가 있지만 동문의 법제자(法弟子)의 관계를 갖는 셈이다.

    깊은 경지에 이르른 그는 당대의 유학의 대가이던 노수신(盧守愼)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의 장서를 7년 남짓 모두 통람하는 등 유교에 대한 소양을 넓혔다. 이러한 교우관계는 당시 배불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여건 속에서 승려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한 방편이었다고도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고승들 치고 그 문집 가운데 유학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시구(詩句)가 들어 있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

    그의 박학다식은 물론 필적도 뛰어나 명성이 세상에 드날리자 사명대사와 함께 부휴를 흔히 이란(二難)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몸을 피해 덕유산으로 들어갔다가 병란(兵亂)이 가시자 가야산으로 갔다. 이러한 면은 어떻게 보면 그의 소극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그 점이 동시대의 서산이나 사명의 면모와 무척 대조적이어서 그가 오늘날 널리 알려지지 못한 요인이 되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의 행장의 기록만 볼 때 이러한 해석은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당시의 여건과 그가 몸담고 있던 불교계의 상황은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여하튼 그는 가야산 해인사에서 명나라 장수 이종성 ( 李宗城 )을 만나게 되었고 서로 대담(對談)하는 가운데 이종성은 그가 큰 그릇임을 알고 바쁜 일정 가운데 그곳에 더 머물면서 서로 지우(知友)가 됐다. 광해군 원년(서기 1609)에 송광사에서 부휴를 청하자 그의 상족제자(上足弟子)인 벽암(碧岩)을 위시하여 4백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송광사에 내려가 절을 중수(重修)하였다. 광해군 4년(서기 1612)에는 벽암각성(碧岩覺性)과 함께 광승(狂僧)의 무고(誣告)를 입어 투옥되었다. 그러다 광해군은 그를 보자 뛰어난 풍모와 수행인의 자세를 보고 오히려 하사품(下賜品)을 내려 그들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어느 때인가 봉인사(奉印寺)에서 국제를 베풀 때 부휴대사를 청하니 모두들 그를 보려고 몰려들어 더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탁월한 인품을 말하는 일화일 테이지만 그에게는 항상 7백여 명의 대중들이 따랐다 한다. 72세의 만년에 이르자 부휴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주석하다가 칠불사(七佛寺)로 옮겨갔다. 그 해(서기1615)7월 벽암각성에게 ‘나의 뜻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기를 바라노라’는 전법(傳法)의 말을 하고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읊었다.

    ‘73년간 환해(幻海)를 노닐다
    오늘 아침에 이르러
    껍질을 벗고 처음의 원천으로 돌아왔네.
    모든 것이 공적(空寂)하여
    본래 아무 것도 없었음을 확연히 깨달았네.
    어찌 깨달음과 생사의 뿌리가 있을 건가.’

    광해군은 그를 추서(追敍)하여 홍각등계(弘覺登階)라 하였고 그의 영골(靈骨)은 송광사·해인사·칠불사·백장사 네 곳에 탑을 세워 나누어 봉안했다.


    (3) 승려의 본분

    지금까지 우리는 부휴대사의 행장을 충실히 그대로 이해해 왔다. 그의 행장 기록만을 따른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특징적인 점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산 시대의 흐름 속에 그를 위치 지을 때 그는 새로운 면모를 갖고 부각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부휴가 서산과 함께 조선조의 불교를 가름하는 이대 산맥 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서산이 대외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그만치 그는 승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또 한 분의 고승인 진묵스님은 제자들에게 법맥(法脈)을 논하는 자리에서 서산을 한마디로 ‘명리승(名利僧)’이라 경멸하고 있다. 서산의 위대성만치 그는 ‘명리승’적인 면을 지녔다는 점은 이미 서산의 위치와 한계를 지적한 말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명리승이 아닌 승의 본분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은 서산 자신의 글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서산이 부휴에게 보낸 시 한편은 승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준다.

    ‘소림(少林)의 소식이 끊어지니
    아득히 보통년간(普通年間)<달마대사와 선문답을 한, 양무제(梁武帝)의 연호(年號)>이 떠오르네
    쌓인 눈은 속절없이 삼척이라
    사손(思孫)<달마의 법을 이은 혜가(慧可)>의 두 팔이
    온전하랴″ (부휴자)

    서산은 자신의 현실참여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불법의 전수를 위해 달마대사처럼 수선(修禪)하고 전법(傳法)하기를 부휴에게 부탁하고 있다. 부휴를 지적하여 전법·수선의 시를 보낸 서산의 의도는 명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명 역시 부휴에게 이와 유사한 글을 전하고 있다.

    ‘소림에 어느 날 봄이 다시 돌아 올까.
    지금 정안(正眼:불법의 바른 길)그대가 있을 뿐.
    무너진 법 다시 잡을 이 다시 뉘 있으랴’(贈浮休子)

    사명도 적극적 현실참여라는 점에서는 서산 못지 않은 공적을 남겼으나 그 역시 부휴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부휴의 소극적 태도는 다른 면에서 적극적 의미를 띠는 것이다. 곧 그에게는 전쟁의 와중에 승단의 정도(正道)를 지킬 의무가 부여되고 있었다. 당시의 불교계의 상황을 서산문중의 일선(一禪)은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말법의 쇠퇴한 세상은 혼란을 극하여 민생은 안도함이 없으니 승인들 편안히 머무를 수 있겠는가? 적은 잔악한 해를 끼치고 사람들은 노고가 많으니 도인들 올바로 서겠는가? 갈수록 처참한 자만 들어나니 승복을 입었건 속복을 입었건 모두 종군하여 동분서주하다 적의 손에 죽음을 당하거나 혹은 여염에 들어가 피해버리니 속진에 물들기는 마찬가지다. 그 가운데 출가한 뜻을 망각해 버리고 만다. 계율의 행은 영영 없어져 버리고 헛된 이름만 바란다. 불길은 퍼져 돌이킬 수 없으니 선풍(禪風)은 잠적하려 하는구나’ (静觀集)

    부휴·서산·사명이 처했던 상황을 여실히 지적하고 있으며 불교계를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부휴는 의승군(義僧軍)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수선위주의 승단부흥을 위한 일을 떠맡을 입장이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부휴 자신이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남 못지 않게 국가의 존망과 민생의 피폐함을 걱정하고 있었다. ‘국세(國勢)가 위급해지고 평화롭지 못하니 법문은 쇠미하여 황폐해지고 또 밝히기 어렵게 됐다’ ‘언제 흉적을 제거하여 다시 오도(吾道:불법)로써 산문을 진작시킬 것인가’ ’병세(兵勢)가 분분하여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간다. 홀로 길게 탄식하기를 3년, 백성을 근심하니 눈물이 흐른다’(浮休堂集)

    부휴 역시 서산·사명 못지 않게 전쟁의 참상과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곧 승단에서 그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수하고 법등을 지킬 임무가 부여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소극적 현실관은 승려 계의 기대에 부흥하는 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설명되지 않고는 달리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혼란 중에 승려의 본분을 지키고 수선·수행의 맥을 이어갔기에 7백여 명의 제자를 거느릴 수가 있었고 가히 서산문중에 필적할 부휴명맥을 형성하여 조선중기의 불교를 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므로 해서 서산·부휴 이후 한국의 불교계는 양대 산맥을 형성하여 많은 고승·성덕을 낳게 한 것이다. 부휴는 결코 거목 아래서 자라고 있던 잡목이 아니고 그 자신 하나의 거목인 것이다. 그러나 호국불교나 대외적 활동을 중시하는 우리의 눈(眼)이 그를 지나치리 만치 왜소화 시킨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 글 : 이민용 동국대강사. 인도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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