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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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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 생애와 사상

Ⅰ.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

1.초의선사의 생애(生涯)
2.초의선사의 사상(思想)
1) 차 사상(茶思想)
2) 선 사상(禪思想)


Ⅱ.초의선사의 해제
1) 일지암시고(一枝 詩稿)
2) 일지암문집(一枝 文集)
3) 초의선과(草衣禪課)
4)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5) 동다송(東茶頌)
6) 다신전(茶神傳)
7)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
8)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
9) 초의시고(艸衣詩稿)


Ⅲ.초의선사의 년보(年譜)


Ⅳ.참고문헌




Ⅰ.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

1.초의선사의 생애(生涯)

선사는 1786년 조선 정조(正祖) 10년 병오(丙午) 4월 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務安郡 三鄕面)에서 태어났다. 속성(俗姓)은 장(張)씨이며 흥성(興城)이 본관이다. 子는 중부(中孚) 법명(法名)은 의순(意恂), 초의(艸衣)는 염화지호(拈花之號)이다. 또다른 호(號)조서는 해옹(海翁), 해양후학(海陽後學), 해상야질인(海上也 人) 일지암(一枝庵) 우사(芋社) 자우(紫芋)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초사(艸師)라고도 했다.

스님의 출생과 생애에 관해서는 신헌(申櫶)이 편찬한 ''''사호보제존자초의대종사의순탑비명(賜號普濟尊者艸衣大宗師意洵塔碑銘)''''과 이희풍(李喜豊)이 찬술한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 그리고 구계화상(九階和尙)이 저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 중 ''''초의선백전(艸衣禪伯傳)'''', 유경도인(留耕道人)이 저술한 ''''초의대선사운(艸衣大禪師韻)'''' 등에 보이고 그 외로 진도(珍島) 사람 우당(愚堂)이 쓴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庵序)''''와 허소치(許小痴)의 ''''몽연록(夢緣錄)''''과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에 잘 나타나 있다.

스님의 가계(家係)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고, 어머니가 큰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다섯살(1790년)이 되는 해에 강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준 사람덕분에 살아난일이 있었고, 열다섯살이 되던 해에는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운흥사(雲興寺)로 찾아가 벽봉민성(碧蜂敏性)스님께 의지하여 출가 하였다.

이곳에서 불경(佛經)을 익히고 있다가 열아홉(1804년)이 되는 해에 영암(靈岩)의 월출산(月出山)에 혼자 올라가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있던중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깨친 바 있어 가슴에 맺힌 것이 시원하게 풀리니 가는 곳마다 별로 꺼릴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후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와서 완호(玩虎)스님을 뵙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초의(艸衣)라는 법호(法號) 역시 이때 받은 것이다. 완호스님은 연담(蓮潭)스님의 법손(法孫)으로 조계문인(曹溪門人)이다. 그 법맥을 보면 서산청허(西山淸虛)스님에게서 편양언기(鞭羊彦機)스님이 나왔고, 편양스님에게서 풍담의심(楓潭義諶)스님이 나왔고, 풍담스님에게서 월담설재(月潭雪齋)스님이, 월담스님에게서 환성지안(喚惺志安)스님이, 환성스님에게서 호암체정(虎岩體淨)스님이, 호암스님에게서 연담유일(蓮潭有一)스님이, 연담스님에게서 백련도연(白蓮禱演)스님이, 백련스님에게서 완호윤우(玩虎倫佑)스님이, 완호스님에게서 초의의순(艸衣意洵)스님이 나온것이다.

이때부터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경전을 배우면서 틈틈이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의 뜻을 통하고 또한 탱화(幀畵)를 잘 그려서 당나라 오도자(吳道子)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님께서 남기신 신상(神像)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현재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신상(影幀神像)은 거의 대부분이 스님께서 손수 금어(金魚)가 되어 그리셨거나 증사(證師)가 되었던 작품이다. 유독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준제보살상(準提菩薩像)을 좋아하여 그리셨다. 지금도 대흥사 유물관에는 사십이수십일면관세음보살상(四十二手十一面觀世音菩薩像)이 두 점이나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단청(丹靑)도 잘 해서 조사(祖師)스님들을 모신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짓고 손수 단청을 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여(禪餘)에 익힌 글씨는 일가를 이루어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쓰셨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일생의 지음(知音)이 되었으나 추사체에 영향을 받지 않은 별개의 글씨를 썼다.

24세(1809년)에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와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던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과 만나 깊이 사귀면서, 다산에게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워 유학에도 정통하였고, 선경(禪境)에 들어 운유(雲游)의 멋도 누렸다. 2년 후 26살(1811년) 되던 해에는 대흥사 천불전에 불이 나서 가람 아홉동이 하룻밤새에 다 타버렸다. 그래서 스승을 따라 불사에 진력하였으며, 더구나 가까이 지내던 도반 아암혜장(兒菴惠藏)스님이 입적하시니 스님의 쓸쓸한 마음은 다산 선생과 더욱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이듬해(1812년) 가을 9월 12일에는 다산선생과 그의 제자 윤동(尹 )과 함께 월출산 백운동(白雲洞)에 들어가 놀면서 백운동 외경을 그렸다. 백운동에는 십이승경이 있는데, 옥판봉(玉版峰), 산다경(山茶徑), 정유강(貞 岡), 모란체(牧丹 ), 취미선방(翠微禪房), 백매오(白梅塢), 창하벽(蒼霞壁),유상곡수(流觴曲水), 홍옥폭(紅玉瀑), 풍선(風 ), 정선대(停仙臺), 운당원(  園)이다. 이때 그린 그림이 백운도(白雲圖)이다. 그 다음장에 십이승경(十二勝景) 마다 다산선생과 초의선사가 시(詩)을 번갈아 지었으며 맨끝장에는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도(茶山圖)를 붙이고, 다시 윤동이 발문을 지어 한폭의 시축도(詩軸圖)를 만들었다. 이 백운첩(白雲帖)은 최근까지 강진 사람이 소장하고 있다가 서울 인사동의 통문관(通文館) 주인 이겸노(李謙魯)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그 뒤 다시 인천으로 팔려갔다.

30세(1815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는데, 가는 도중 전주(全州)에 들러 명필 이삼만(李三晩) 등과 사귀어 한벽당(寒碧堂)에서 시회(詩會)를 열어 즐겼으며 서울에 올라가 두릉(杜陵)에 사는 다선선생의 아들 유산(酉山:丁學淵), 운포(耘浦:丁學遊)와 자하(紫霞:申緯), 해거(海居:洪顯周)등과 만나서 같이 두해 동안을 놀았다. 이때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산천 김명희(山泉 金命喜), 금미 김상희(琴 :金相喜)와도 사귀었다.

2년 후 32세(1817년) 봄에는 추사와 동로 김재원(東老 金在元) 등과 함께 시회를 하고 헤어져 경주로 내려가 불국사(佛國寺)를 구경하고 기림사(祇林寺)에 가서 천불(千佛)을 점안(點眼)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천불을 모실 천불전상량문(千佛澱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千佛記)를 지어서 모시었다.

이때 경주에서 대흥사로 옮기던 천불 중 300분을 모신 배가 폭풍을 만나 표류해서 일본의 나가사끼(長崎)에 갔었다. 이듬해(1820년7월15일) 다시 모시고 귀국하여 돌아와 천불전에 함께 모셨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이때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만들고 그 절목(節目)을 손수 써주시고 가셨다.

38세(1823년)에는 대둔사지(大芚寺誌) 간행사업에 가담하여 사지편찬을 도왔다. 본래 대둔사지는 그 행방을 알 길이 없고 다만 죽미기(竹迷記)와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었다. 이를 기초로하여 의견을 첨부해서 사지를 편찬했으니 초의, 수룡(袖龍)스님이 편집하고 호의(縞衣), 기어(騎魚)스님이 교정하고 완호(玩虎), 아암(兒菴)스님이 감정(鑑定)을 해서 대둔사지를 편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지를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필사했다.

이듬해 39살(1824년) 때에는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했다. 이 암자는 스님께서 일생동안 은거하셨던 곳으로 스님의 사상과 철학을 집대성한 곳이요. 차문화를 펴던 자리이기도 하다. 스님은 이곳에서 선(禪)의 논지(論旨)를 바로 세워 초의선과(艸衣禪課)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를 저술하였고, 차문화를 부흥시키고저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 초시(抄示)하였다. 이 밖에 많은 시(詩)와 잡문(雜文)들이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스님께서 일지암을 짓고서 읊은 시 한 수가 있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었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45세(1830년)에는 다신전(茶神傳)을 펴내서 차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도록 했다. 이는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만 완독하면 차를 만들어서 끓여 마실 수 있도록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차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다신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해 가을에 스님께서 두 번째로 서울에 가서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에게 스승님(완호스님)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해거도인께서 겨울 내내 선비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즐기다가 보니 비문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훗날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에게 부탁해서 짓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 금미 김상희(金相喜)가 써서 비를 대흥사비전에 세웠다.

46세(1831년)에는 스님께서 그동안 화운(和韻)하거나 지으신 시(詩)들을 한데 모아서 초의시고(艸衣詩藁)라고 제명하여 시집 한 권을 만들었다. 이 시집의 서문은 당시 유가(儒家)의 사표(師表)라고 하는 연천거사(淵泉居士) 홍석주(洪奭周)와 조선조 시의 명인(名人)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맡아 지었다. 이때 스님은 시작법(詩作法)에도 완숙하여 생애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시를 지었다. 이듬해에도 서울에 머물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일지암으로 돌아왔다.

스님의 나이 48세(1883년) 때에는 조용히 일지암에서 지내면서 뜰에 대나무를 심었다. 이때 추사의 아버지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선생이 일지암으로 스님을 찾아오셨다. 유당 선생은 이곳에서 가까운 완도 고금도(古今島)에서 와서 4년여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때 자기의 아들 추사 김정희와 친숙하게 지내는 초의스님의 인물됨을 한 번 보고 싶어 유배지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일지암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며 초의스님을 만나보니 그 덕행이 지고(至高)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유당 선생은 초의스님의 인격에 반해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또 초당 뒤에 있는 유천(乳泉)의 물맛이 소락( 酪)보다도 좋다고 극구 예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일지암을 방문한 유당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관악산 밑에 은거하다가 4년 후(1837년) 숨을 거두었다.

50세(1835년) 봄에 진도사람 허유(許維)가 일지암으로 스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치(小痴) 허유는 재주는 있으나 견문이 부족하고 스승이 없어 화법(畵法)을 몰라 망설이다가 스님을 찾아온 것이다. 이로부터 삼년 동안을 꾸준히 화법과 시학(詩學), 그리고 불경과 차(茶)를 배웠다. 훗날 스님의 소개로 추사의 제자가 되어 한국 남종화(南宗畵)의 선구자가 되었다.

52살(1837년) 봄에 일지암에서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 하였다. 동다송은 해거도인 홍현주가 부탁을하여 저술한 것인데, 동국(東國)에서 생산되는 차를 게송(偈頌)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데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나라 차의 우월성 등을 말했다. 또 각 구마다 주(註)를 달아 자세한 설명을 첨가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해놓았다.

동다송은 한국차의 성전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으며 차의 전문서로는 유일한 것으로, 다만 아쉬운 것은 스님의 친필본 동다송이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굴 소개된 동다송은 모두 4종류로써, 신헌구가 필사한 다예관본(茶藝館本)과 석오 윤치영(石梧 尹致英)이 필사한 석오본(石梧本)과 대흥사의 법진(法眞)스님이 필사한 법진본(法眞本)과, 송광사의 금명(錦溟)스님이 필사한 금명본(錦溟本)이 있다.

이듬해 53살(1838년) 되던 해 봄에 일지암을 출발하여 서울을 거쳐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갔다. 처음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러 간 것이다. 두루 둘러본 뒤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구경하고 돌아올 때는 다시 한양(서울)에 들러서 해거도인의 시집(詩集)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해거도인은 순조의 부마로서 시에 능하고 학문이 깊어 존경받아오던 분인데, 사문(沙門)의 몸으로 그의 시집에 발문을 쓰게 되었음은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더욱이 동다송 역시 해거도인의 부탁을 받고 지었다는 점에서 스님과 해거도인의 친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조선조 사회에서 천대 받던 승려의 신분으로 유가의 빼어난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나눈 것은 오직 스님의 깊은 학문이 그들로 하여금 존경하게한 것이다.

스님이 55세(1840년) 때에는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았다. 스님은 호남팔고(湖南八高) 중에서 한 분으로 그 학덕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헌종이 소치(小痴)에게 묻기를 ''''호남에 초의라는 승(僧)이 있다는데 그 지행(持行)이 어떠한가?'''' 하였다. 소치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컫습니다. 내외전(內外典)에 정통하며 사대부와 종유(從遊)가 많습니다'''' 라고 했다.

이처럼 스님의 학덕이 널리 알려져 많은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왕사나 국사제도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헌종으로부터 사호를 받았다는 것은 오로지 스님의 학덕과 지행이 널리 모든 선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왕사제도가 폐지된 조선 중기 이후에 사호를 받은 사람은 스님 외에는 없었다.

이듬해 여름에는(1841년) 두륜산 마하연에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새로 짓고, 보련각에 서산대사를 위시하여 12대 종사(十二代 宗師)스님과 12대 강사(十二代 講師)스님, 역대조사(歷代祖師) 고승대덕(高僧大德)스님 등 172분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이때 추사는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 가서 있었는데, 소치편에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다실(茶室)의 현판을 써서 보내왔다. 이 현판은 지금도 대흥사 동국선원(東國禪院)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후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도 써서 보내왔으며,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걸작의 경문(經文)도 써보내 주었다. 이런 것들은 추사 당대의 최고의 절필로서 세상의 진귀한 보물이다. 애석하게도 그 원본은 하나도 없이 수집가들의 손에 흘러들어가 버렸다.

58세(1834년)에는 스님께서 고향에 찾아간 감회를 시로 옲었다.


''''멀리 고향을 떠난 지 사십여년 만에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왔네.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 데 없고,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욱마다 수심에 차네.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수구(首邱) 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新基草沒家安在 古墓笞荒履跡愁
心死恨從何處起 血乾淚亦不能流
孤 更欲髓雲去 已矣人生傀首邱

사십여 년만에 찾아간 고향. 늙은 몸으로 백발을 이고 찾은 고향, 어린 동몽의 기억으로 옛 집을 그리워하다 찾아간 고향이 이미 거덜난 쑥대밭이란다. 누가 슬프지 않으랴 돌보는 이 없어 옛 묘에는 이끼만 가득 끼었고, 소식조차 물을 사람이 없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고향 언덕쪽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고향을 쉽게 잊으랴, 마음은 죽고 상했는데 한은 뼈 속 깊이 사무치고 눈물이 앞을 가려 먹장삼만 적신다.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수구한다는 말 하지 말라 부끄럽구나.

62세(1847년)에는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를 찬술(撰述)했다. 예전에 전주에 갔을 때 진묵조사에 대한 실기를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鍾) 선생으로부터 자세히 들었는데, 전주 봉서사(鳳棲寺)의 스님이 찾아와 진묵조사의 기문(記文)을 청했다. 이에 스님께서 전에들은 바를 기록하여 상하 두권으로 묶어 진묵조사유적고를 저술 하기에 이른 것이다.

66세(1851)에는 석오 윤치영(尹致英)과 위당(威堂) 신관호(申灌浩)가 초의스님 시집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에 발문(跋文)을 썼다. 이때 석오 윤치영은 일지암을 방문하고 스님이 새로 창건한 대광명전신건기(大光明殿新建記)를 짓기도 했으며, 또 동다송 석오본을 필사하기도 했다. 이 동다송은 서울의 이일우(李一雨)씨가 소장하고 있다.

71세(1856년)에는 금란교계(金蘭交契)를 사십이년간이나 깊게 나누던 추사 김정희가 서울 관악산 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때 대정(大靜)까지 찾아가 반년 동안을 함께 유배지에서 살면서 위로하였고, 용호(蓉湖:서울)에 있을 적에는 같이 두해를 지냈다.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나누던 이들은 항상 외롭고 한적한 곳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정담을 나누었다. 이처럼 지내다가 홀연히 추사가 먼저 떠나니 스님은 그의 영전에 제문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눈물로 작별을 하고 산사 일지암(一枝庵)에 돌아온 뒤로는 쓸쓸하게 지냈다. 그토록 좋아아던 시도 짓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오직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산문 밖에는 일체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모든 일을 생각 밖에서만 이루어 놓았고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풍체는 범상(梵相)으로 위엄이 있고 뛰어나서 옛날 존자(尊者)의 모습과 같아 여든이 넘어서도 소년과 같이 건강한 모습이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대교(大敎)를 간포(刊布)하는 일이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으나 곧바로 암자로 돌아오셨고,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에서 무량전(無量殿)을 짓는 모임에도 주선(主禪)의 자리에 모셨지만, 어디든 잠시 응했을 뿐 곧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리하여 줄곧 일지암에 주석(住錫)하셨는데, 하룻밤에는 몸져 누우셨다가 시자(侍者)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跏趺坐)를 하시고 앉아 홀연히 입적(入寂)하시니, 그때 세수(世壽)는 81세요 법랍(法臘)은 65세로서 조선 고종(高宗) 3년 8월 2일이었다. 스님이 입적하신 지 오래되도록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며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

다비(茶毘)를 마친 뒤에 제자 선기(善機) 범인(梵寅) 등이 영골(靈骨)을 받들어 대흥사 비전에 부도(浮屠)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이때가 고종 8년 신미년(辛未年) 4월로 입적하신 지 5년째 되던해 봄이다. 이때 송파거사(松坡居士) 이희풍(李喜豊) 선생이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을 찬술했다. 그후 병조판서를 지낸 의금부사(義禁府事) 신헌(申櫶)에게서 비명(碑銘)을 얻어 그 옆에 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헌이 추금(秋琴) 강위(姜瑋)에게 부탁해서 대신 지은 것이다. 이 비를 세우기는 스님이 입적하신 뒤 75년만인 1941년 4월에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泳)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스님께서 남기신 저서로는 일지암시고(一枝庵詩藁),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초의집(艸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초의선과(艸衣禪課),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등이 있다.



2.초의선사의 사상(思想)

1) 차 사상(茶思想)

선사의 차사상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으리라. 먼저 동다송(東茶頌)을 통해 본 선사의 다도관(茶道觀)과 다신전(茶神傳)을 통해 본 차생활과 그리고 다시(茶詩)를 통해 본 차정신일 것이다.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차를 알고자 해서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海居道人 洪顯周)에게 지어서 보낸 차의 전문서이다.

동다(東茶)라는 말은 동국(東國) 또는 해동(海東)이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를 말한다. 이 차를 게송(偈頌)으로 읊었다고 해서 동다송이라고 했다.

이 동다송의 대의(大意)를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로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시도록 해라. 둘째로 우리나라 차는 중국차에 비교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안차(六安茶)의 맛이나 몽산차(蒙山茶)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로 차에는 현묘(玄妙)하고 지극(至極)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의선사의 다도관(茶道觀)이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동다송 제29송에서 말하기를, 다도란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을 함께 얻는 것이라고 했다. ‘평해서 말하기를 채다(採茶)는 그 묘(妙)를 다해야 하고, 조다(造茶)는 그 정성(精誠)을 다해야 하고, 물(水)은 그 진(眞)을 얻어야 하고, 포법(泡法)은 중정(中正)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체(體)와 신(神)이 서로 고르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을 일컬어 다도(茶道)에 이르렀다고 한다.(評曰 採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至此而茶道盡矣)''''

선사의 다도관을 알고자 한다면 문(門) 행(行) 득(得)의 길을 거쳐야 한다. 대저 문이 있어서 들고 행(行)해서 얻는(得) 법이다. 4문(四門)이 있으니 채(採) 조(造) 수(水) 화(火)가 그것이며, 행에는 4행(四行)이 있으니 묘(妙) 정(精) 근(根) 중(中)이 그것이며, 득에는 4득(四得)이 있으니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이 그것이다.

4문의 채란 채다(採茶)를 말하며 조란 조다(造茶)를 말하며, 수란 수품(水品)을 말하며 화란 화후(火候)를 말한다. 4행의 묘는 채다의 현묘(玄妙)함을 말하며 정은 조다의 정성(精誠)스러움을 말하며, 근은 수품의 근본(根本)을 말하며, 중은 화후의 중화(中和)를 말한다.

4득은 진다(眞茶)와 진수(眞水)를 얻어야만이 얻을 수 있는데, 차(茶)는 물(水)의 신(神:정신)이요 물은 차의 체(體:몸)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진다(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체와 신이 비록 온전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잃으면 안된다. 중정을 잃지 않으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는다. 신(神:정신)과 체(體:몸)는 기(機:기틀)와 용(用:작용)과 같고, 건(健:건전)과 영(靈:신령)은 이(理:이치)와 묘(妙:현묘)와 같다. 그러므로 신(神:정신)이 건(健:건전)하면 기(機:기틀)가 이(理:이치)하고, 신(神)이 영(靈:신령)하면 기(機)가 묘(妙:현묘)하고, 체(體:몸)가 건(健)하면 용(用:작용)이 이(理)하고, 체(體)가 영(靈)하면 용(用)이 묘(妙)하다.

신(神)과 체(體)는 기(機)와 용(用)과 같아서 불이(不二)해야만 건(健)과 영(靈)을 얻는다. 건(健)과 영(靈)이 불이(不二)하면 묘리(妙理)하고, 묘리하면 묘경(妙境)하고, 묘경하면 묘각(妙覺)한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도 표(圖 表)


채다(採茶)란 차를 따는 일을 말한다. 차나무에서 차잎을 따는 것은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너무 빠르면 맛이 온전하지 못하고 늦으면 싱그러움이 흩어진다. 곡우(穀雨:4월20일)와 입하(立夏:5월5일) 사이가 적기인데 일창일기(一槍一旗) 이기(二旗)의 잎이 푸른빛이 나거나 쭈글쭈글하거나 돌돌 말린 것이 좋다.

차잎을 딸 때 밤새 구름이 끼지 않고 이슬이 흠뻑 내린 후에 딴 것이 좋으며, 비온 후나 구름이 끼었을 때는 따지 않는다. 그리고 계곡이나 암석 사이에서 자란 것이 좋다. 이처럼 채다는 현묘함을 다 해야만 된다.

그 현묘(玄妙)함를 다해서 채취한 차잎을 가지고 조다(造茶)를 하는데 솥이 매우 뜨거워졌을 때 급히 차잎을 넣어 덖어야 한다. 차가 익어서도 안되며 태워서도 안된다. 차가 익으면 빛깔이 검고 타면 노랗고 흰 반점이 생긴다. 이렇게 적당한 열기로 대여섯 번 정도 덖으면 차가 잘 건조된다.

불은 연기가 나지 않아야 되며 불의 기운이 고르게 되어야만 한다. 양질의 차잎과 고르고 순수한 불과 만드는 사람의 정성스런 마음이 합쳐져서 진다(眞茶)가 나오는 것이다.

수품(水品)은 차를 끓일 물을 말하는데, 산마루에서 나는 석간수가 좋고 우물물이 다음이며 강물은 나쁘다. 물에는 8덕(八德)이 있으니, 가볍고(경:輕) 맑고(청:淸) 시원하고(냉:冷) 부드럽고(연:軟) 아름답고(미:美) 냄새가 나지 않고(부취:不臭) 비위에 맞고(조적:調適) 탈이 나지 않는 것(무환:無患)이 그것이다.

물은 그 근본(根本)을 구하지 않으면 상하거나 오염되기가 쉬워서 고여 있는 우물물이나 강물은 쓰지 않는다. 바로 그 근원지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어야 한다. 이 샘물을 구하여 체성이 튼튼한 불로 끓이면 좋은 탕수(湯水)가 된다. 만약 대나무나 썩은 나무가지나 낙엽같은 연료는 불의 체성이 허약하여 탕(湯) 또한 체성이 약해진다. 이런 탕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연기가 나지 않고 체성이 튼튼한 불을 구하여 가볍게 빨리 끓여야 한다.

이때 문(文)이 지나치면 수성(水性)이 유약하게 되고 수성이 유약하면 차가 뒤지고 쳐지며, 무(武)가 지나치면 화성(火性)이 극렬해져서 차를 위해 물이 억제되며 성근 기가 위로 뜬다. 이것을 문무화후(文武火候)라고 하는데 지나치면 모두 중화(中和)를 얻지 못한다. 그 적절함을 다하여 중화를 얻어야 진수(眞水)가 나오는 법이다.

진수와 진다를 얻었을 때 비로소 중용(中庸)의 덕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진다와 진수가 아니면 신과 체를 규명할 길이 없고, 신과 체를 규명하지 못하면 건과 영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다와 진수를 얻어서 신과 체를 규명하고 신과 체가 불이(不二)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포법(泡法:차 울궈내는 법)을 하는데 포법은 중정(中正)을 지켜야만 한다 그 요체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차가 많아도 안되고 물이 많아도 안된다. 차가 많으면 빛깔이 노랗고 빨가며, 맛은 쓰고 떫으며 향내도 좋지 않다. 반대로 차가 적고 물이 많으면 맛이 온전하지 않고 빛깔도 엷고 향내도 미숙하게 된다. 적당한 양의 차와 물을 넣어야 한다.

둘째로 다관에서 차를 울구는 시간이다. 너무 빨리 따라내면 맛이 미숙하고 향내도 약하며 빛깔이 엷고 좋지 않다. 반대로 너무 오래 울구면 빛깔도 탁하고 맛도 쓰고 떫으며 향내도 지나치게 된다. 알맞게 울궈야 한다.

세째 차를 잔에 골고루 나누어 따를 때, 너무 급히 서둘러 따르는 것을 급주(急主)라 하고, 게으르고 완만하게 따르는 것을 완주(緩注)라고 한다. 완주나 급주를 해서는 안된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이 적당한 양의 차를 넣어 알맞게 울궈서 적당한 시간에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서 마시는 것이다. 이것을 중정법(中正法)이라고 한다. 중정법을 잘 지키는 길은 마음 속에 중용(中庸)의 덕을 품되 그 팔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적의함을 다하면 중정을 얻게 된다.

중정을 얻게 되면 자연히 신과 체를 규명하게 되고 신과 체를 얻으면 건과 영을 얻게 되는데, 신과 체가 불이하고 건과 영이 불이하면 기용(機用)이 불이하고 기용이 불이하면 묘리(妙理)가 불이하고 묘리가 불이하면 이치가 현묘한 경지에 들어 뜻한 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생각으로 헤아릴일이 아니로다. 오직 체득하는 데 그 진체(眞諦)가 있으니 진정으로 구해볼 일이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다도관(茶道觀)을 완성한 선사의 차생활과 정신은 어떠했는가. 선사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번거로움은 피하고 자유스럽고 검소하며 편안하게 즐기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좋은 차와 좋은 물, 잘 끓여서 중정을 잃지 않은 차를 원했다. 그렇다. 진다와 진수, 그리고 중정을 잃지 않은 차, 이것이면 족한 것이다. 이 외에 더 구할 것이 있다면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나 행세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서 선사의 제자인 허소치(許小痴)가 말하는 초의선사의 차생활을 들어보기로 하자.

『바로 그 노장님(초의)이 내 평생을 그르치게 만들어 놓았다고나 할까요. 아주 젊은시절 내가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하고 담적하게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을미년(1835년)에 나는 대흥사에 가서 초의선사를 뵈었습니다. 선사가 거처하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두어 칸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지요. 수양버들은 처마를 스치고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려 뜰 복판에 파둔 상하 두 연못 속에 비치어 아롱졌습니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차 절구를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선사의 자작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못을 파니 허공 중에 밝은 달이 담궈지고
간짓대를 이어 구름샘을 얻었네.
눈앞을 가리는 나뭇가지를 잘라내니
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저리도 많구나.

이와 같은 시구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선사의 그 청고하고 담아한 경지는 세속인들이 입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양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선사는 고요에 잠긴 채 시를 읊으면서 흥얼거렸습니다.

향불을 피워 향내가 은은히 퍼질 때에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일어나 뜰을 거닐면서 스스로 취흥에 젖어들곤 했습니다. 정적에 잠긴 작은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새들과 상대하고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손님이 찾아올까봐 살며시 숨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초암에 있는 선사의 서가에는 서책들이 가득했었는데 그 모두가 다 연화와 패엽(貝葉)이었습니다. 상자 속에 가득찬 구슬 같은 두루마리는 법서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초암(일지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곳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매일 선사와의 대화는 모두 물욕 밖의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평범한 세속의 사람이지만 어찌 선사의 광채를 받아 그 빛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을 받고서 어찌 세속의 티끌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노장님이 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소치의 말처럼 물욕 밖에서 청고하고 담아하게 살다간 선사의 차생활은 한폭의 신선도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한생을 걸림없이 살다가신 선사의 차정신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다론(茶論)에서 말씀 하시기를 ''''8덕(八德)을 겸비한 진수(眞水)를 얻어 진다(眞茶)와 어울려 체(體)와 신(神)을 규명하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없애고 나면 대도(大道)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옛부터 성현님네가 즐겨 마시게 되었고 그 성품은 군자를 닮아 사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악하지 않은 차, 이 차는 묘한 근원을 가지고 있어 그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라밀(婆羅密)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바라밀이란 일체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으므로서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른것을 말한다. 차를 마시면서 신과 체를 규명하여 건과 영을 얻어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바라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현묘(玄妙)한 경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차(茶)이다.

선사는 이와 같이 바라밀에 이르는 길에서 모든 법이 불이(不二)하니 선(禪)과 차(茶)도 불이하고 제법(諸法)이 일여(一如)하다고 했다. 그래서 선사는 차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이같은 선사의 차정신은 ''''모든 법이 둘이 아니니 선과 차도 한 경지니라(諸法不二 禪茶一如)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모든 면에 나타나 선과 차가 둘이 아니고 시(詩)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고, 차와 시가 둘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선의 여가에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며 글씨를 썼으니 세인들은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선사는 차를 마시다가 흥얼흥얼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세상사를 잃어버리기도 하며, 정적에 잠긴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기도 하며,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송림에 걸린 달을 보기도 하고, 향을 사루어 은은히 퍼질 때 차 한잔 달여놓고 무심히 앉아 있으니, 선사의 청고하고 담적한 차생활은 참으로 쉽고 편안하다.

이러한 선사의 사상은 다산(茶山)과 추사(秋史)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니 추사가 선사께 보낸글귀 가운데 이런 사상을 내포한 글이 많이 있다. 명선(茗禪)과 선탑다연(禪榻茶烟) 그리고 정좌 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가 그것이다. 이는 모두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경지를 천명한 것이다.

여기에 선사의 게송 한 구절을 소개한다.

대도(大道)는 지극히 깊고도 넓어
가 없는 바다와 같고
중생이 큰 은혜에 의지함은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는 것과 같네.
오묘한 이치는 밝고 역역한 것이라.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는 것.
어찌 감히 불근(不根)으로써
일찍이 해조음(海潮音)을 듣고서
황망히 군자의 방에 들어가
함께 진리를 말할 수 있으랴.
달빛도 차가운 눈 오는 밤에
고요히 쉬니 온갖 인연이 침노하네
그대는 아는가 무생(無生)의 이치를,
옛날이 곧 오늘인 것을.


2)선 사상(禪思想)

스님의 선(禪)사상은 그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초의선과(艸衣禪課)]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변만어는 당시의 유명한 선(禪)의 중흥조인 백파선사(白坡禪師:1767-1852)가 선(禪)의 종지(宗旨)를 후학들이 알기 쉽게 풀이하여 펴낸 [선문수경(禪文手鏡)]의 선론(禪論)을 반박하기 위해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초의선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선문염송선요소(禪門拈頌選要疏)]라고도 하며, 내용은 선문염송(禪門拈頌)가운데서 일부 선론(禪論)만을 뽑아서 당신의 선론을 추가해 일지암에서 묶어 펴낸 책이다. 이 책은 판본(版本)으로 간행된 적이 없고 필사본만이 전한다. 그러나 스님의 선사상(禪思想)이 가장 잘 나타난것은 선문사변만어이다.

백파선사의 선문수경이 세상에 나온 뒤, 선(禪)의 진의(眞意)가 오도되고, 불타와 달마조사의 근본사상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초의스님은 급기야 사변만어를 써서 선문수경의 선론을 논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백파(白坡)스님이 주장하는 삼종선(三種禪), 즉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으로 분류하는 것을 인정치 않고 이종선(二種禪)을 고집하였다. 이종선(二種禪)은 인명(人名)으로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으로 나눌 수 있고, 법명(法名)으로는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義理禪)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사선(祖師禪)은 격외선(格外禪)과 같고, 여래선(如來禪)은 의리선(義理禪)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근원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보니 이 논쟁은 크게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어 송광사에서 우담홍기(優曇洪基:1822-1881)가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써서 백파(白坡)스님의 선론을 논박했다. 이에 다시 설두유형(雪竇有炯:1824-1881)스님이 초의의 선론과 홍기의 선론에 반해서 선원소유(禪源溯流)를 써서 백파(白坡)스님의 선론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렇게 한바탕 조선조 말기에 선의 논쟁이 일어나 급기야는 사원에 양대 선론이 팽배해졌다. 이 논쟁은 무려 반세기 이상을 끌고 오는 동안 초의스님의 편에 선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이 논쟁에 참여 했고 다시 논쟁의 불꽃이 어느 정도 꺼졌다 싶을 때 속리산 법주사의 축원진하(竺源震河)스님이 선문재정록(禪文再正錄)을 써서 다시 들먹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말기에 일어난 선의 논쟁은 한국불교선종사를 재확인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하튼 초의스님의 사변만어는 전적으로 선문수경을 논박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지마는 초의스님이 고수하려는 선론이 잘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 선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논쟁점의 골자만을 간추려 본다면, 첫째로 임제삼구(臨濟三句)를 백파(白坡)스님은 제 1구는 조사선(祖師禪)이오, 제 2구는 여래선(如來禪)이요, 제 3구는 의리선(義理禪)이다 라고 보고, 초의스님은 제 1구는 조사선(祖師禪)이오, 제 2구는 여래선(如來禪)이나, 제 3구는 의리선(義理禪)이 아니라 제 1구와 제 2구의 [병본구( 本句)]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같이 임제 3구를 삼종선(三種禪)으로 보는 백파(白坡)의 견해를 비판하며, 제 1구나 제 2구를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으로 보는 것은 인정하나 제 3구를 의리선으로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하며, 이는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의 [병본( 本)]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로, 선문오종(禪門五宗)인 임제종(臨濟宗). 운문종(雲門宗). 조동종(曹洞宗). 위앙종(僞仰宗). 법안종(法眼宗)을 각각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에 배정하고, 그외 오종선문(五宗禪門)에 들지 못하는 북종(北宗)의 신수계(神秀系), 우두종(牛頭宗)의 법융계(法融系), 하택종(荷澤宗)의 신회계(神會系)를 의리선에 배정한 것이 잘못이다 라고 초의스님은 비판했다.

셋째로, 초의스님은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의 의미규정을 백파(白坡)스님과 달리하고 있다. 백파스님은 이를 [근기(根機)]의 차이로 보고, 초의스님은 법(法)의 은(隱:祖師禪). 현(顯:如來禪)으로 보고있다.

이 외로 살활(殺活), 기용(機用) 진공(眞空) 묘유(妙有),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劒)등에서도 다른 견해를 보여 사사건건 반론을 제기하며, 백파(白坡)스님이 변고이상(變古易常)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초의스님의 선론은 평소에 교(敎)에만 치우치지 않고 그렇다고 선(禪)에만 기울지도 않는 독특한 [지관(止觀)]법(法)으로 수행했다고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지란(止觀)이란 지(止:Samatha)와 (觀:Vipasyana)의 합성어로서, 지(止)는 일체의 경계를 끊어 버리고 조금도 분별하거나 헤아림이 없는 것을 말하며, 관(觀)이란 이세상 모든 사물이 지니는 본질적인 본분(本分)을 깊이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치지(지:止) 않으면 정(定)에 들 수가 없고, 보지(관:觀) 않으면 지혜(혜:慧)를 얻을 수 없다. 이같은 지관법은 [선교병수(禪敎幷修)]로서 처음에 교(敎)에 들고 나중에 선(禪)에 드는 초심자의 수행지침으로 한동안 우리나라 불교계를 지배해 오고 있었다.

이 사상은 일찌기 원효(元曉)나 중국(中國)의 천태(天台)와도 같은 사상이며, 고려의 의천(義天:敎觀幷修)이나 지눌(知訥:定慧雙修)도 이같은 주장을 했으며, 조선의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그의 제자들도 다 택했던 수행 방법이다.



Ⅱ.초의선사의 저술(著述)

1)일지암시고(一枝 詩稿)

스님이 일생동안 선(禪)의 여가에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지은 시(詩)이다. 모두 4권(四卷)으로 되어 있는데, 필사본으로 필사한 사람은 알수가 없고 4권(四卷)이 한책으로 묶여져 있다. 이 책은 고(故)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이 소장하고 있다가 1975년에 보련각(寶蓮閣)에서 영인(影印)하여 펴냈다.

권(卷) 1에는 109수의 시(詩)가 실려 있는데 30대의 작품으로서 (22세에서 44세 때까지 작품) 22세때 화순(和順) 쌍봉사(雙鳳寺)에 가서 지은 최초의 시 [8월15일효좌(八月十五日曉坐)]를 비롯해서 다산(茶山:丁若鏞)선생에게 지어 드린 시, 그리고 처음으로 상경(上京)하여 유산(酉山:丁學淵) 운포(耘逋:丁學遊) 추사(秋史:金正喜) 산천(山泉:金命喜) 등 형제분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읊은 시, 그후 경주 불국사(佛國寺)에 가서 쓴 회고의 시 등이 실려 있다.

권2에는 110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45세에서 46세 때까지 2년동안의 작품이다. 일지암을 짓고 은거한 후로 지은 [중성일지암(重成一枝庵)]시와 45세때 두번째로 서울에 올라가서 수종사(水鍾寺), 두능(杜陵), 채화정(菜花亭), 청량사(淸凉寺), 용문사(龍門寺), 열수(洌水)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해거(海居:洪顯周), 유산(酉山), 운포(耘逋), 진재(眞齋:朴鍾林) 광산(匡山:朴鍾儒) 저원(樗園:洪羲人) 경당(絅堂:尹正鎭)등과 화운(和韻)한 작품 42수가 있다.

권3에는 47세에서 57세까지 11년 사이에 지은 작품 122수가 실려 있다.

일지암으로 북산도인(北山道人) 변지화(卞持和)가 찾아 와서 함께 화답(和答)한 시와 암자 주변에 대나무를 심고 지은 [종죽(種竹)]시, 이 시에서는 은거인의 맑고 담아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후 금강산에 구경 갔다가 그곳에서 지은시가 있고, 돌아올때 서울에서 해거(海居), 추사(秋史), 산천(山泉)과 화운(和韻)한 시 10수가 포함되어 있다.

권4에는 58세 때부터 65세까지 8년 동안에 지은 시 60수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8수는 신관호(申觀浩), 황상(黃裳), 산천(山泉), 유산(酉山) 운포(耘逋)등과 함께 지은 것이고, [귀고향(歸故鄕)]시는 58세때 40년만에 고향에 가서 눈물로 쓴 작품이다. 65세 이후에도 많은 작품이 있으나 이 책에는 실려 있지 않고 여기저기 따로 흩어져 있다.

이 외에도 서예가 창암(蒼巖:李三晩)선생과 화운한 시가 여러편 전해지는데 이 책에서는 빠져 있다.

그리고 시고 말미에 석오 윤치영(石梧:尹致英)과 위당 신관호(威堂:申觀浩)와 백파거사 신헌구(白坡居士:申獻求)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2)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이 문집은 스님이 일생동안 지은 소(疏), 기(記), 서(序), 발(跋),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영찬(影贊)등 52개 항목과 부록으로 탑비명(塔碑銘)이 수록되어 있는데, 필사본으로 광서16년(光緖十六年:1890)에 그 문인(門人) 월여범인(月如梵寅)스님이 편집하고 원응계정(圓應戒定)스님이 정서해서 펴냈다. 스님이 열반에 드신지 24년째 되던해 5월에 산일되어 있던 것을 한데 모아서 묶은 것이다. 이 문집의 체제를 보면 전2권 일책(一冊)으로 되어 있고 뒤에 부록이 첨가되어 있다.

권1에서는 소( ) 3편, 상량문(上樑文) 4편, 기(記) 5편, 서문(序文) 8편, 발문(跋文) 2편으로 모두 22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요한 내용을 보면 천불전상량문(千佛殿上樑文)과 천불기(千佛記), 그리고 표충사이건기(表忠祠移建記)와 상량문(上梁文), 그의 스승인 완호법사(玩虎法師)의 탑비음기(塔碑陰記)와 대둔사(大芚寺) 출신의 승계보(僧系譜)를 적은 승보안서발문(僧寶案序跋文), 그리고 말년에 대광명전(大光明殿)과 보련각(寶蓮閣)을 창건하고 서산대사(西山大師) 이후 대흥사(大興寺)에서 배출된 12대 종사(宗師)와 12대강사(講師) 스님을 비롯해서 고승대덕(高僧大德) 172위(位)의 영(影)을 모신 대광명전상량문(大光明殿上樑文)을 지었다.

또 일생의 지기(知己)였던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 시집발문(詩集跋文)을 실었다.

권2에는 발문(跋文) 5편, 모연문(募緣文) 2편, 권선문(勸善文) 1편, 보살계패규(菩薩戒牌規) 1편, 법문(法文) 1편, 제문(祭文) 9편, 축문(祝文) 2편, 영찬(影贊) 3편, 서간문(書簡文) 6편등 모두 30개 항목이 실려 있다. 그 중요한 내용을 보면 해인사대웅전(海印寺大雄殿)과 대장경각중수권선문(大藏經閣重修勸善文)과 대둔사탑원다례제문(大芚寺塔院茶禮祭文), 그리고 스님의 출가 사찰인 운흥사(雲興寺)에 가서 법문한 보살계법문(菩薩戒法文)과 은조사(恩祖師) 백련화상(白蓮和尙)의 영찬(影贊), 완당(阮堂) 김정희공(金正喜公)의 제문(祭文)과 수계은사(授戒恩師)의 제문(祭文), 그리고 문도 형제의 제문(祭文)과 법제자(法弟子)와 상좌제문(上佐祭文), 또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해서 보낼때 함께 보낸 편지 [상해거도인서(上海居道人書)]와 추사(秋史)에게 답한 [답쌍수도인(答雙修道人)]다산(茶山)에게 보낸 서간문 등이다.

부록으로 신헌(申櫶)이 찬(撰)한 [초의대종사탑비명(艸衣大宗師塔碑銘)]과 [초의화상게(艸衣畵像偈)]와 송파거사(松坡居士) 이희풍(李喜 )이 찬(撰)한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이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대승계(大乘戒)를 받은 [수대승계자명(受大乘戒者名)]이 실려 있다.


3)초의선과(草衣禪課)

초의선과는 선(禪)의 요지(要旨)를 밝힌 [선문염송(禪門拈頌)] 중에서 그 골자만을 가려내 주석을 달아 만든 책이다. 한지 일책(一冊)으로 되어 있는데 가로가 19cm 세로가 27cm 크기로 전부 34장이다. 이중 표지가 2장이며 서문이 1장 본문이 31장 55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 체제를 보면 처음에 [선문염송선요소(禪門拈頌選要疏)]를 붙여 [선문(禪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선이란 중봉(中峯)선사의 말씀에 범어로 선나(禪那)이며, 사유수(思惟修) 또는 적멸(寂滅)이라 이름하니, 한마음의 극치를 가리킨다. (선자중봉선사운범어선나차명사유수역명적멸내지일심지극치야 禪者中峯禪師云梵語禪那此名思惟修亦名寂滅乃指一心之極致也)]

이와 같이 선(禪)에 대해서 서설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모두 55개 항목으로 나누어서 문답의 형식처럼 원문을 앞에 놓고 각항마다 주석을 달아 엮어 나간다.

그 첫머리에 [염송병주(拈頌幷註)]라고 제(題)하고 그 밑에 [자우주석(紫芋注釋)]이라고 하였다. (紫芋)는 초의선사(草衣禪師)의 당호(堂號)로서 자우산방(紫芋山房)의 줄인 말이다. 또 [일지선방 중부자술(一枝禪房 中孚子述)]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지암(一枝庵)을 말하는 것으로 일지암(一枝庵)은 39세에 지어서 40여년간 [독처지관(獨處止觀)]하시던 곳이다. 그리고 중부자(中孚子)란 스님의 자(字)이다.



4)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선문사변만어는 어느 여름날 영남에서 왔다는 백파선사(白坡禪師)의 법제자(法弟子)로 부터 백파선사(白坡禪師)의 선론(禪論)을 듣고서 틀린곳을 바로 잡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그 경위는 사변만어 첫 머리에 상세히 나와 있다. [영남(嶺南)에서 온 객이 말하기를 자기는 목부산(木浮山) 육은노인(六隱老人:白坡禪師)의 법제자라고 했다. 비가 와서 십여일 묵는 동안에 스승의 선론(禪論)을 말했는데 그 중에 옛 고덕(古德)의 뜻에 어굿나는 점이 있으므로 본래의 뜻에 따라 바로잡는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변만어를 저술하게 되었는데, 그후 계축년(1913) 6월 10일에 증법손 벽담대사(碧潭大師)와 경연(鏡淵)스님이 주관하여 인간(印刊)하게 되었다.

그 체제를 보면 일책 전22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머리에 원응계정(圓應戒定)스님이 쓴 [서문(序文)]이 들어 있고, 그 다음에 본문이 12장에 걸쳐서 이어진다. 말미에 [이선래의(二禪來義)]와 [격외의리변(格外義理辨)], [살활(殺活)], [진공묘유변(眞空妙有辨)]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이선내의(二禪來義), 격외의리변(格外義理辨), 살활, 진공묘유변은 초의스님의 견해를 밝힌 것이요, 사변만어(四辨漫語)는 백파선사(白坡禪師)의 선론을 한구절 쓰고 그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규명하는 방법으로 스님의 견해를 붙였다.



5)동다송(東茶頌)

동다송은 [한국의 다경(茶經)]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의 전문서이다. 스님의 나이 52세(1837년) 되던해 봄에 [다도(茶道)]를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에게 저술해서 보낸 것이다.

이 동다송은 처음에는 [동다행(東茶行)]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동다송(東茶頌)]으로 바꿨다. 이 책의 체제와 내용을 보면 모두 31송으로 되어 있는데, 각 송구(頌句)마다 주(註)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옛 고전(古典)인 다경(茶經)과 신이기(神異記), 만보전서(萬寶全書), 다서(茶序), 등(等) 21개 문헌을 34회에 걸쳐 인용하여 스님의 다론(茶論)이 [고인소전지의(古人所傳之意)]에 어긋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동다송의 대의를 살펴보면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차는 인간에게 너무 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셔라 둘째, 우리나라 차(東茶)는 중국의 차에 비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안차의 맛이나 몽산차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 차에는 현묘(玄妙)과 지극(至極)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의 다도관(茶道觀)을 완성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섯종류가 있는데, 일지암 소장본과 홍현주 소장본, 다예관본(茶藝館本)과 윤치영본(尹致英本)과 법진본(法眞本)과 금명본(錦溟本)이 그것이다. 본문에서 밝힌바대로 일지암본과 홍현주본은 초의스님의 친필본으로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고, 다예관본(茶藝館本)과 윤치영본(尹致英本)과 법진본(法眞本)과 금명본(錦溟本)만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다예관본(茶藝館本)은 태평양 다예관(太平洋 茶藝館)에 초의스님의 다른 유품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고, 석오(石梧) 윤치영본(尹致英本)은 서울의 이일우(李一雨)씨가 소장하고 있고, 법진본은 전남 담양에 사는 수진(守眞)스님이 소장하고 있으며, 금명본은 송광사(松廣寺)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6)다신전(茶神傳)

다신전은 차 생활에 필요한 차의 지침서로서 스님이 45세(1830년) 때에 일지암에서 정서해서 펴낸 것이다. 다신전은 스님의 완전한 창작이 아니고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라는 백과사전 속에 수록되어 있는 [채다론(採茶論)]의 원문을 초출(抄出)해 내서 제명(題名)을 하고 발문(跋文)을 달아 만든 책이다. 그러니까 스님이 43세(1828년) 때 여름에 지리산 칠불선원(七佛禪院)에 갔다가 그곳에서 등초(謄抄)해 가지고 와서 사원에서 차를 알고자 하는 이가 많아 그 2년 뒤인 경인년 봄에 책명을 [다신전(茶神傳)]이라 하고 그 경위를 말미에 달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의 체제와 내용을 보면 전부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채다(採茶), 조다(造茶), 변다(辨茶), 장다(藏茶), 화후(火候), 탕변(湯辨), 탕용노눈(湯用老嫩), 포법(泡法), 투다(投茶), 음다(飮茶), 향(香), 색(色), 미(味), 점염실진(點染失眞), 다변불가용(茶變不可用), 품천(品泉), 정수불의다(井水不宜茶), 저수(貯水), 차잔(茶盞), 식잔포(拭盞布), 다위(茶衛)]등(等)이다. 그리고 말미에 발문(跋文)을 달아 놓았다.

이 다신전은 현재 다예관(茶藝館)에 소장한 것이 있고, 법진본(法眞本)이 있고, 일본인(日本人) 가입일웅(家入一雄)이 쓴 [조선(朝鮮)의 차(茶)와 선(禪)]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있으며, 일지암에 소장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예관본(茶藝館本)과 법진본(法眞本)과 가입일웅(家入一雄)이 등초한 것과, 다신전의 원본인 장원(張源)의 다록본(茶錄本)과, 만보전서(萬寶全書)의 원문(原文)이 있을 뿐이다. 스님이 친필로 쓴 [일지암본]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



7)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

진묵조사유적고는 초의스님이 1847년 봄에 지은 것이다. 이 책을 찬술하게 된 경위는 발문에 상세히 나와있다.

[내가 임인년(1842) 겨울에 은고(隱皐) 김공을 완산(完山:전주)에서 만났을 때 공은 조사의 자취를 매우 상세하게 말하였으며, 또 두어 곡(斛)의 쌀를 준비해서 뜻을 같이 한 한 두명 선비들과 함께 성의를 모아 봉서사(鳳棲寺)에다 조사의 실적(實蹟)을 기록하여 산문을 진무(鎭撫)하고야 말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도를 멀리까지 전파하려는 뜻에서 였을 것이다. 그 6년뒤인 정미년(1847) 봄에 봉서사에서 왔다는 어떤 스님이 나의 거실인 일지선방으로 나를 찾아와 역시 이 일로써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는지라 김공의 뜻에 대한 감회도 있고 또 지금 청하는 이에게 등을 돌리기도 어렵고 하여 그 전해오는 구비(口碑)의 사실을 대략 기록하였으니 운고(雲皐)에게 전하여 고명한 김공의 수정을 요청하다]라고 하였다.

진묵조사는 명종 17년(1562)에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조사의 휘는 일옥(一玉)이며 진묵(震默)은 법호이다. 인조 11년(1633)에 입적하니 나이가 72세요, 법랍이 52세요, 10월 28일이었다.

이 유적고의 체제를 보면 은고거사 김기종의 서문(序文)이 먼저 실려 있고, 그 다음에 초의스님의 서문이 있다. 그리고 본문 유적고 상권이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모두 18개 항목으로 나누어 시이(神異)한 행적을 기록하여 놓았다. 그리고 상권 말미에 [석가여래인지(釋迦如來因地)] 4장이 실림으로써 상권이 끝난다. 다음 하권(下卷)에는 조수삼의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와 초의스님의 발문(跋文)과, 운고(雲皐)스님의 발문(跋文)과, 김영곤의 발문(跋文)과, 김영학의 발문(跋文)등을 하권으로 묶었다. 이와같이 상하 2권1책으로 해서 엮었는데, 이 유적고가 아니고는 진묵대사에 대한 행장은 알 길이 없다. 다른 문헌에는 대사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므로 이 기록이 유일한 것이다.



8)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

스님이 평소에 지은 서(序), 발(跋), 제문(祭文), 서간(書簡) 등(等) 11편을 수록한 수고(手稿) 초본(草本)이다. 그 편목(篇目)은 모두 필사본(筆寫本)인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과 중복(重複)되나, 이 전집(全集)에서는 스님의 수고(手稿)의 편린(片鱗)를 보이는 뜻에서 부재(附載)하였다.

다만, 특기(特記)할 것은, [상해거도인서(上海居道人書)]의 경우, 편명(篇名) 다음에 [정유하(丁酉夏)]라는 주기(註記)가 있고, 본문(本文) 가운데에 [근술동다해일편이진헌(謹述東茶行一篇以進獻)]이라는 구절(句節)이 있어, [동다송(東茶頌)]의 저술 시기가 정유년(丁酉年:1837) 여름 이었으며, 처음에는 [동다행(東茶行)]이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9)초의시고(艸衣詩稿:木活字本)

스님의 입적(入寂) 40년 후(後)인 병오년(丙午年:1906)에 그 법손(法孫) 상운응혜(祥雲應惠)와 법제 (法弟) 쌍수일한(雙修一閒)이 인간(印刊)한 목활자본(木活字本)이다. 전 2권 2책이며, 권지하(卷之下) 후반(後半)에는 문(文)이 실려 있다. 권수(卷首)에 홍석주(洪奭周)와 신위(申緯)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윤치영(尹致英)과 신헌구(申獻求)의 발문(跋文)이 있는 것은 필사본(筆寫本)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와 같으나, 신관호(申觀浩)의 발문(跋文)이 빠지고, [병오4월하완지일일 원응계정 근서(丙午四月下浣之一日 圓應戒定 謹書)]라는 발문(跋文)이 있다. 수록(收錄) 편수(篇數)로 보면, 시편(詩篇)은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와 순서(順序)의 차이(差異)는 있으나 편목(篇目)은 동일(同一)하며, 문편(文篇)은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보다 훨씬 적게 실려 있다. 전권(全卷)에 걸쳐 문자(文字)의 이동(異同)이 산견(散見)된다.



Ⅲ.초의선사의 연보(年譜)

1758년 완호윤우(玩虎倫佑) 태어남.
1762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태어남.
1766년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태어남.
1969년 자하(紫霞) 신위(申緯)태어남.
1772년 아암혜장(兒菴惠藏) 태어남.
1774년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태어남.
1778년 호의시오(縞衣始悟) 태어남.
1779년 하의정지(荷衣正持) 태어남.
1783년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태어남.
1786년 (丙午. 正祖 10년) [1세]

*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三鄕面)에서 초의(艸衣) 태어남. 속성(俗性) 장씨(張氏).
* 6월 3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충남 예산군 신암면(新岩面) 용궁리(龍宮里) 월성위(月城尉)의 집에서 태어남.
* 7월 29일, 운포(耘逋) 정학유(丁學遊) 태어남.
1788년 (戊申. 正祖 12년) [3세]
*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태어남
1790년(庚戌. 正祖 14년) [5세]
* 9월 백파긍선(白坡 璇) 설파상언(雪坡尙彦)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음.
1791년(辛亥. 正祖 15년 [6세]

* 김정희, 초정(楚亭) (朴齊家:1750~?)와 첫 대면함. {6세 때 대문에 춘첩을 써서 붙였는데, 정유 박공이 지나가다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유당을 방문하여 선생을 보고는 칭찬과 찬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예를 배워 세상에 이름을 날릴 것이니 내가 이를 가르쳐 성취시키겠다고 하였다. [六歲書春書帖于門 貞 朴公見而異之 訪於酉堂 公見先生 加稱歡曰 堂以學藝名世 五將敎而成之]

1798년(戊午. 正祖 22년) [13세]

* 10월, 대둔사대회(大芚寺大會), 완호법사가 청풍료(淸風寮)에 머물면서 겨울동안 학인 1백여 명을 모아 놓고 능엄경(楞嚴經)을 가르침.

1799년 (己未. 正祖 23년) [14세]

* 2월 3일, 연담유일(蓮潭有一)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 삼성암(三聖庵)에서 입적함. 세수(世壽)80세, 법랍(法臘) 62세. 다비(茶毘)한 뒤 대둔사. 법천사(法泉寺), 미황사(美黃寺)에 부도비(浮屠碑)를 세움.

1800년 (庚申 . 正祖 24년) [15세]

* 초의 전남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덕룡산(德龍山) 운흥사(雲興寺)에서 대덕(大德) 벽봉민성(碧峰敏性)에게 의지해서 출가함.

1801년 (辛酉. 純祖 1년) [16세]

* 김정희 . 박제가에게 사사 받으면서 청나라의 고증학을 배움.

* 11월, 정약용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강진(康津)에 유배됨. 동촌주가 사의재(東村酒家. 四宜齋)

* 이 해에 초의가 출가했다고 하는 설이 있음. 이희풍(李喜豊)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

1803년 (癸亥. 純祖 3년) [18세]

* 봄, 연담조사(蓮潭祖師:유일)의 비를 세움.

1804년(甲子. 純祖 4년) [19세]

* 초의 월출산(月出山)에 올라 밤에 달을 보다가 크게 깨우침. 도갑사(道岬寺)에 머무름. 고향에 다녀옴.

1805년(乙丑. 純祖 5년) [20세]

* 봄, 아암(兒菴) 백련사<白蓮社:만덕사(萬德寺)> 주지에 취임함.

* 가을, 정약용 만덕사에서 아암과 첫 대면함. 사의재<四宜齋:주가(酒家)>에서 고성사(高聲寺:寶恩山房)로 옮김. 처음으로 차생활(茶生活)을 시작함.

* 겨울,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아암화상께 보냄.

1806년(丙寅. 純祖 6년) [21세]

* 가을, 정약용 학래(鶴來) 이청(李晴)의 집으로 옮김.

* 김정희 초취(初娶) 한산이씨(韓山李氏) 별세함.(20세설도 있음)

1807년(丁卯. 純祖 7년) [22세]

* 초의 능주(綾州) 쌍봉사<雙峰寺:전남 화순군 이양면(梨陽面) 중리(中里) 소재>에서 지냄. (한가위 새벽에 八月十五日曉坐). (가을날 회포를 적다 秋日書懷)를 지음.

* 봄, 대둔사에서 가사불사(袈裟佛事)를 베풂.

* 봄, 아암 두륜산(頭輪山)에 암자<일발암(一鉢庵)>를 지음, 정약용이 ''''일발암기(一鉢庵記)''''를 써서 증정함.

* 4월 3일, 초의의 은조사(恩祖師) 백련도연(白蓮禱演) 대둔사 청운당(靑雲堂)에서 입적함.

1808년(戊辰. 純祖 8년) [23세]

* 완호 대둔사 낭암화상대회(朗岩和尙大會)에 참석하고 겨울을 지냄. 약사전(藥師殿)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독함.

* 봄, 정약용 다산초당<茶山草堂:전남 강진군 도암면(道岩面) 귤동(橘洞) 윤단(尹 )의 서고>으로 옮김.

* 혜장(惠藏) 정약용의 권유로 ''''아암(兒菴)’이라 자호(自號)함.

1809년 (己巳. 純祖 9년) [24세]

* 초의 대둔사에서 (탁옹선생에게 奉呈 翁先生)를 지음.

* 초의 정약용과 첫 대면함. 탁옹은 다산 정약용의 별호임. 정약용 대둔사를 왕래함.

* 여름, 정약용 은봉(隱蜂) 두운선사(斗云禪師)의 부탁으로 ''''만일암지(挽日菴志)''''를 지음.

* 김정희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0월에 동지사(冬至使) 일행으로 중국에 다녀옴.

10월 28일,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조옥수(曹玉水)등과 첫 대면함.

* 소치(小痴) 허련(許鍊)태어남.

1810년(庚午. 純祖 10년 [25세]

* 초의 대둔사에서 (승검초를 캐며 采山 行). (시냇가를 거닐면서 溪行). (만일암에 쓰노라 題挽日蘭若) 등을 지음.

* 3월 17일, 김정희 연경(燕京)에서 귀국함. 명차(茗茶) 용단승설(龍團勝雪)을 마시면서 ''''승설학인(勝雪學人)’으로 자호함.

* 산천 김명희 관직에 나감.

1811년(辛未. 純祖 11년) [26세]

* 2월, 천불전(千佛殿) 화재로 소실됨. {가리첨사가 이경에 사찰에 들어와 삼보에 횃불을 만들어 창고에 들어갔는데 불티가 떨어지는 줄 모르고 다니다가 이로 인해 불길이 솟았고, 가허루, 천불전, 대장전, 용화당, 적조당, 지장전, 약사전, 향로전 등 아홉 건물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타버린 것을 완호대사가 몸소 축문을 써서 차례로 재건했다. [加利僉使 二更入寺 三補取炬入庫 不知火落 因而火起 駕虛樓. 千佛殿. 大藏殿. 龍華堂. 寂照堂. 地藏殿. 藥師殿. 香爐殿等九寮一夜燒燼 玩虎大師自荷軸勸 以次起立]

* 봄, 아암 북암(北庵)에 머물면서 시를 지어 정약용에게 보여줌. 장춘동잡시20편(長春洞雜詩二十篇)

* 9월 15일, 아암 북암에서 입적함. (의발은 수룡(袖龍)에게 전해짐)

1812년(壬申. 純祖 12년) [27세]

* 초의 대둔사에서 고향에서 병사한 이찬학자를 애도하며 ''''도리찬학자병사고(悼理贊學者病死故鄕)''''를 지음. 혹은 계미년(1823년)이라고도 함.

* 9월 12일, 초의 정약용 윤동(尹 )등 세 사람은 월출산 백운동에서 십여일을 보내면서 백운첩(白雲帖)을 만들었다. 백운동 외경을 그린 백운도(白雲圖:초의)와 그리고 그 다음장에 백운동의 십이승경(十二勝景)마다 다산과 초의가 시(詩)을 번갈아 지었으며 맨끝장에는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도(茶山圖:초의)를 붙이고 그 말미에 윤동이 발문을 써서 붙였다.

* 신위 중국에 다녀옴. 김정희가 옹방강에게 보내는 7언절구를 보냄.

* 봄, 호의 완호의 문하에 드러가 법호를 받음. 이때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그 종의(宗誼)를 돈독히 하기 위해 호게(號偈)와 서문을 써서 증정함.

1813년(癸酉. 純祖 13년) [28세]

* 초의 대둔사에서 (비에 갇혀 다산초당에 가지 못하고 阻雨未往茶山草堂) (연못 속 어린 고기를 노래함 賦得池中魚苗)등을 지음.

* 5월, 천불전상량문(千佛殿上樑文)을 지음.

* 8월 4일, 정약용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초의를 위해 글을 지어 증정함.

* 금미(琴 ) 김상희(金相喜) 관직에 나아감.

1814년(甲戌. 純祖 14년) [29세]

* 초의 대둔사에 머묾.

1815년(乙亥. 純祖 15년) [30세]

* 초의 처음으로 한양 오는 길에 (한벽당에 올라 登寒碧堂). (만향각에서 유산과 함께 읊음 蔓香閣與酉山共賦). (파당 가는 길에 巴塘途中). (수종사 회고 水鍾寺懷古). (서성에서 눈오는 밤에 산천거사 김명희와 두목의 운에 맞춰 西域雪夜與山泉居士金命喜拈杜樊川韻). (다시 한유의 운에 맞춰 又拈昌黎韻). (옥경산방에서 자면서 주인에게 드리는 30운 宿玉磬山房奉贈主人三十韻) 등을 지음.

* 초의 김정희. 김명희와 첫 대면함.

*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 출간됨.

1816년(丙子. 純祖 16년) [31세]

* 초의 수락산(水落山)에서 (함벽정에서 자면서 학고도인에게 삼가 드림 宿涵碧亭奉贈鶴皐道人)을 지음

* 초의 대둔사로 돌아와 (철경대사가 지지옹에게 준 시에 차운함 次 鯨大師寄止止翁韻)을 지음.

* 7월, 김정희 북한산에서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고 예자각( 字刻)을 판독함.

1817년(丁丑. 純祖 17년) [32세]

* 초의 대둔사에서 (한양에 가는 철경선사를 보내며 送 鯨禪師遊漢陽)를 지음.

* 4월 29일, 김정희 경주에서 무장사( 藏寺)를 찾아 시를 지음.

* 6월, 초의 경주(慶州)에서 (불국사 회고 佛國寺 懷古)를 지음.

* 8월, (동장에서 동로승지 김재원. 담재승지 김경연. 황산승지 김유근. 추사시교 김정희와 헤어지면서 東莊奉別東老金承旨在元覃齋金承旨敬淵黃山金承旨 根秋史金侍敎正喜) 21수를 지음.

* 9월 14일, 정약용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감.

* 10월, 중조천불기(重造千佛記)를 지음.

* 10월, 경주 기림사(祇林寺)에서 천불을 조성해서 점안(點眼)함.

* 10월 16일, 불상을 싣은 배가 출발함.(그 중 한 척은 표류해서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닿음)

* 8월, 옹방강(翁方綱) 별세.

1818년 (戊寅 . 純祖18년) [33세]

* 6월 17일, 일본 (나가사끼에 표류한 배)에서 출발하여 부산진을 경유하여 완도 원동(院洞)에 도착.

* 7월 15일, 원동에서 대둔사로 부처님(300위)을 옮겨옴.

* 8월 15일, 새로 지은 법당(千佛殿)에 천불을 봉안함.

* 정약용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을 지음.

* 김정희 남산에 올라 잠두봉(蠶頭峰)에 머리를 두고 옹방강을 애도함.

* 가을, 김정희 ''''아암장공완역소상(兒庵藏公玩易小像)''''을 봉래각(蓬萊閣)에서 제찬(題贊)함.

1819년(己卯. 純祖 19년) [34세]

* 초의 대둔사에 있으면서, 천불전 안에 신중정(神衆禎)을 조성할 때 증사(證師)가 됨.

* 이재( 齋) 권돈인(權敦仁) 중국에 들어감.

1820년(庚辰. 純祖 20년) [35세]

*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 태어남.

1821년(辛巳. 純祖 21년) [36세]

* 초의 대둔사에 머무름.

1822년(壬午. 純祖 22년) [37세]

* 초의 대둔사에 머물면서 (산수도 팔첩에 부쳐서 題山水圖八帖). (다정 윤효렴 종영이 가연산에 살면서 ''''겨울노래''''를 보내왔기에 ''''봄노래''''. ''''여름노래''''. ''''가을노래''''를 짓고 아울러 보내온 ''''겨울노래''''와 합해서 ''''사시사''''를 만들어 다시 보내다 茶亭尹孝廉鍾英賦 伽延山居冬詞寄余 余賦春夏秋詞與冬詞 合成四時詞還呈). (과거에 응시한 다정을 보내며 送茶亭赴京試). (김도촌이 율시 한 수를 보내왔기에 차운해서 보냄 金道邨寄一律次韻却寄) 등을 지음.

* 김노경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중국에 들어감. 김정희의 아우 김명희도 수행함. 입연(入燕)했을 때 김노경은 56세였고, 김명희는 35세였음.

* 우담홍기(優曇洪基) 태어남.

1823년(癸未. 純祖 23년) [38세]

* 초의 대둔사에서 (금강석상에서 언선자와 더불어 왕우승의 종남별장에서 지은 작품에 화운하였다 金剛石上與彦禪子和王右丞終南別業之作). (다시 한창려의 운에 맞춰 유거를 노래하다 又拈昌黎韻同賦幽居). (다시 왕남전의 시에 차운하다 又拈王藍田韻). (도촌 김인항의 초가집을 지나면서 道邨過草庵). (중구일에 호의, 철경, 석범, 하의 스님과 노닐다 九日與縞衣 鯨石帆荷衣諸師遊山). (도촌이 내가 산을 유람할 때 지은 작품에 차운해 보냈기에 다시 화답하다 道邨聞余遊山之作次韻見寄復和答之). (다시 심회를 담아보낸다 又敍自懷奉寄 3首). (수재 강일형에게 寄姜秀才一炯) 등을 지음.

* 대둔사지(大芚寺誌) 간행. (완호, 아암, 호의, 수룡, 기어(騎魚))

* 3월, 김노경, 김명희 일행 귀국함.

1824년(甲申. 純祖 24년) [39세]

* 초의 운흥사에서 (소나무에 비낀 달:松月). (차운하여 다정 윤효렴에게 드림 次韻奉酬尹茶亭) 등을 지음.

* 초의 일지암을 지음.

* 10월 17일, 초의의 제자 월여범인(月如梵寅) 태어남.

* 김정희 경주 남산 창림사탑(昌林寺塔) 다연원(茶淵院) 출토지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無垢淨光大陀羅尼) 고증.

* 김정희 신위와 시를 주고받음.

1825년(乙酉. 純祖 25년) [40세]

* 이 해에 초의가 일지암을 지었다고도 함.

1826년(丙戌. 純祖 26년) [41세]

* 8월 23일, 초의의 은사인 완호,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에서 입적함.

세수 69세, 법랍 53세.

* 초의

일지암에 머묾.

1827년(丁亥. 純祖 27년) [42세]

* 초의 (오늘 다시 두 수에 화운함 今和二首)을 지음.

* 백파(白坡), ''''선문수경(禪文手鏡)'''' 저술.

* ''''해동금석문자요망(海東金石文字要望)''''에 김정희 참여함.

1828년(戊子. 純祖 28년)[43세]

* 초의,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 가서 다신전(茶神傳)을 경당증정만보전서(敬堂增訂萬寶全書)에서 초록해 가지고 돌아옴. 초의 스승 완호의 부도탑을 세움.

* 10월, 초의 나주 운흥사(雲興寺)에 가서 ''''설보살계법문(說菩薩戒法門)''''을 함. 또 수보살계패규(受菩薩戒牌規)를 지음.

1829년(己丑. 純祖 29년) [44세]

* 초의 ''''도암십영(道菴十詠)''''. (쌍계사에서 차운하다 雙溪寺次韻). (교리 한진호의 시에 화답함 奉和韓校理鎭戶) 등을 지음.

1830년(庚寅. 純祖 30년) [45세]

* 초의 일지암에 머묾. ''''다신전''''을 정서해서 펴냄.

* 초의 한양에 올라옴. 겨울, 수종사(水鍾寺)에서 머묾.

* 초의 (언선자의 시에 차운함 次韻答彦禪子). (다시 일지암을 지으며 重成一枝庵). (수종사에서 석옥 화상의 시에 차운함 水鍾寺次石屋和尙韻). (유산정학연의 시에 삼가 화답하다 奉和酉山). (''''두릉시사에서 여러 사백과 함께 지었다 杜陵詩社與諸詞伯同賦). (채화정에 모여서 采花亭雅集). (''''채화정에서 뜨락의 매화를 노래함 菜花亭賦閤梅). (채화정에서의 연구 采花亭聯句). (다시 육언으로 연구하다 又六言聯句). (일언에서 육언까지 연구하다 一言至六言聯句) 등을 지음.

* 11월, 박영보(朴永輔) 남다병서(南茶幷序)를 써서 초의에게 증정함.

* 김정희, 1월 17일에 연경(燕京)에서 이월정(李月汀) 편에 편지를 보내옴. 이 글에 {다기 하나를 보내왔다 茶壺一器來物}는 말이 나옴.

* 김노경 완도(莞島:고금도 古今島)로 4년간 유배당함.

* 겨울, 초의 해거도인을 방문해서 선사(先師)의 비명을 부탁함.

1831년(辛卯. 純祖 31년) [46세]

* 초의 (무자년에 스승의 탑을 만들고 경인년 겨울에는 해거도인을 만나 비명을 부탁했는데, 도인이 여러 선비와 함께 나의 청량산방에서 봄밤을 즐겁게 노닐었었다. 바로 신묘년 정월 중순이었는데, 먼저 ''''樹''''자를 뽑아 각각 오언고시를 한 수씩 노래하였다 戊子先師搭成 庚寅冬謁海居道人乞銘 海居與諸賢會余 于淸凉山房 爲春夜之遊卽辛卯正月之中澣也 先拈樹字 各賦五言古詩一首). (오언절구 초의 五言絶句 艸衣). (다시 청량사의 금파산방에서 노닐며 又遊淸凉寺錦波山房). (해거도인에게 절구를 지어 올림 一絶呈海居). (금파공의 방에서 자며 留宿錦波公房). (다시 사언시를 지으며 又賦四言). (유산에게 드림 呈酉山). (동번에게 드림 呈東樊). (석천으로 차를 끓이며 石泉煎茶). (열수에 배를 띄우고 洌水泛舟). (자하 시랑의 ''''2월 8일''''시에 삼가 화답함 奉和紫霞侍郞 二月八日之作). (하전 김익정이 용문산에서 노닐며 나와 함께 하자기에 마침내 민화산과 같이 가서 지냈다 金夏篆益鼎 遊龍門山 要余偕之遂與閔華山隨行). (노탄에서 하룻밤 자며 蘆灘暮泊). (새벽에 옛 절터가 남아 있는 사천을 지나면서 早過斜川 古寺遺址). (한낮에 사나사에 접어들면서 午入舍那寺). (수월암에서 하루를 자며 上宿水月庵). (가섭봉에 올라서 登迦葉蜂). (윤필암 潤筆菴). (저녁에 상원암에 닿아 暮抵上院). (용문사에 이르러서 至龍門寺). (능산구행원의 수연시 具綾山行遠壽宴詩). (문산. 능산과 함께 직각 용호 김매순 댁에 모여서 與文山綾山會蓉湖金直閣 淳宅). (여름날에 두릉의 이동번이 배를 타고 왔다 杜陵夏日李東乘乘舟而至). (석호정에서 여러 선비들과 노닐며 지음 遊石湖亭與諸公賦). (비를 맞으며 석호정에 올랐는데 범석호가 초가을에 ''''귀석호''''라는 시를 지었기에 이에 차운하였다 石湖亭値雨次范石湖初秋歸石湖韻). (빗소리를 들으면서 聽雨). (여름날 서원에서 여러 선비와 모여 夏日西園與諸公雅集). (북선원에서 자하노인을 만나뵙고 北禪院謁紫霞老人). (금령과 이별하면서 차운하다 次韻留別錦 ). (어산장에 돌아와 김하전과 헤어지면서 歸漁山庄留 別金夏篆). (유산과 이별하며 留別酉山) 등을 지음.

* 초의 한양에 머묾. 초계(苕溪)에서 정학연. 정학유, 광산(匡山) 등 세 사람과 뱃놀이를 즐김.

* 청량사(淸凉寺)에서 송헌(松軒)의 해거도인이 보내온 예물을 받음.

* 홍석주와 신위 초의의 시집(일지암시고)에 서문을 써줌.

1832년(壬辰. 純祖 32년) [47세]

* 초의 대둔사에서 (대산 오창렬이 고호에서 유당을 뵙고 석옥화상의 ''''한거’운에 맞춰 시를 지어보냈기에 이에 차운해서 증정하다 吳大山昌烈謁酉堂於古湖和石屋閑居韻見寄次韻奉呈). (화원에서 북산도인 변지화에게 화운해서 보내다 花源奉和北山道人卞持和). (북산도인이 매화와 난초 그림을 보고 읊은 시에 차운함 奉和北山道人詠畵梅畵蘭). (목관 북산 변지화의 시에 차운하다 次北山牧官韻). (봄날에 호산 정처사의 산장에서 비를 맞으며 春日滯雨葫山鄭處士山莊). (처사 정지묵 만사 鄭處士志默挽詞). (북산도인의 시에 화운하다 奉和北山道人). (정양도인 신태희의 시에 화운해서 드리다 奉和晶陽道人申泰熙). (청량사에 모였을 때 내가 지은 시에 정양이 차운해서 보내왔기에 다시 화답하였다 晶陽和余淸凉寺雅集韻見寄復和答之). (북산이 앞 시에 화운하여 보내면서 다시 화운해 달라고 하다 北山和前韻寄來求和). (북산이 두륜산에 와서 지은 시에 차운해서 삼가 올리다 北山至頭輪見贈次韻奉和) 등을 지음.

* 가을, 초의 ''''대둔사승보안서문(大芚寺僧寶案序文)’, ''''발문(跋文)’. ''''대둔사탑원다례제문(大芚寺塔院茶禮祭文)''''을 지음.

1833년(癸巳. 純祖 33년) [48세]

* 여름, 초의 일지암에서 (대나무를 심으며 種竹), (문춘호가 찾아와서 글을 주기에 차운해서 화답하다 文春湖見訪有贈次韻和之) 등을 지음.

* 김노경 고금도 유배에서 풀려나 일지암을 방문함.

1834년(甲午. 純祖 34년) [49세]

* 초의 (금호에서 산천도인과 헤어지면서 今湖留別山泉道人). (기산이 차를 보내준 일에 감사하면서 장구를 지어보냈기에 삼가 차운하고 아울러 쌍수도인에게도 시를 지어보내다 起山以謝茶長句見贈 次韻奉和兼呈雙脩道人). (쌍수도인과 함께 가을날 장천 별장에서 자면서 與雙修道人秋宿長川別業). (갑오년 국추에 초계를 떠나면서 사공도의 시품에서 ''''유. 수. 금. 일. 명. 월. 전. 신'''' 여덟 자를 따서 각각 삼운 단율로 시를 짓기로 했는데, 나는 ''''水''''자를 따서 지었다 甲午菊秋 將辭苕溪 拈司公圖詩品 流水今日明月前身八字 各賦三韻短律 余得水字). (다시 조당운을 따서 又拈曺唐) 등을 지음.

1835년(乙未. 憲宗 1년) [50세]

* 초의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에 머묾.

* 초의 김정희의 편지를 받음.

* 소치 허련 일지암에 들어와서 초의에게 사사함.[27세] 서예와 그림. 시문을 습작함.

1836년(丙申. 憲宗 2년) [51세]

* 초의 (관서의 찬상인이 글을 지어 달라기에 게송 한 수를 지어보내다 關西贊上人求語聊以一偈贈送). (미타불의 개금모연소를 쓴 뒤에 題彌陀佛改金募綠疏後)를 지음.

* 2월 22일, 정약용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별세. 향년 75세.

* 4월, 김정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됨.

* 허련 일지암에 머묾.

1837년(丁酉. 憲宗 3년) [52세]

* 초의 일지암에 머물면서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해거도인에게 증정함.

* 초의 ''''문자반야집(文字般若集)''''을 저술함.

* 3월 30일, 유당 김노경 별세. 향년 72세. 묘지는 과천(果川)에 있음.

* 허련 일지암에 머묾.

1838년(戊戌. 憲宗 4년) [53세]

* 초의 금강산을 유람하면서(금강산 기행시 遊金剛山詩). (풍입송 風入松)을 지음.

* 초의 ''''해거도인시집발문(海居道人詩集跋文)’을 씀. 금강산에서 사찰로 돌아가는 도중 한양성 동쪽에 있는 해거도인의 집을 방문해서 그의 시집을 본 뒤에 발문을 씀.

* 초의 김정희의 편지를 받음.

1839년(己亥. 憲宗 5년) [54세]

* 초의 한양에서 두릉 다산의 집을 방문하고 청량사에 머묾. 이때 허련의 그림을 가지고 가서 김정희에게 보여 장래성을 묻고 회신을 받아 진도(珍島)에 있는 그의 집에 보내 상경할 것을 권유함.

* 허련 8월에 상경해서 김정희의 제자가 됨.

* 초의(기해년 9월 만소 이희가 나를 찾아와 절구 한 수를 남겼기에 이에 차운해서 보내다 己亥九月李晩蘇曦見訪留題一絶次韻奉呈). (입동날에 전의를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또 만소도 놀이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전운으로 차운한 뒤 창암에 두고 돌아왔다 立冬日訪全醫不  又聞晩蘇亦出遊未還遂次前韻 留題蒼巖而歸). (세화에서 오던 길에 만소를 만나고 헤어져 산으로 돌아왔는데, 만소가 내 시 두 수에 화운하고 또 ''''산''''자로 운을 해서 모두 세 수의 시를 보내와 이에 화운해서 보냈다 細花道中 蜂晩蘇 旋別歸山 晩蘇和余詩二 首又押山字 合三絶寄來 又和而答之). (사문 김금릉과 수재 이창애가 함께 글을 보내 게송을 구하기에 앞 시의 운을 따서 세 수씩 아홉 수를 보냈다 金斯文金陵李秀才蒼崖 竝寄書求偈 遂更次前韻 三疊以寄九首). (만소가 오언고시 한 수를 보내왔기에 차운하고 아울러 칠언고시 한 수도 지어서 보내다 晩蘇以五古一首見贈 次韻奉呈幷衍爲七言一首以寄). (만소의 훌륭한 글을 보고 그 인품을 헤아릴 수 있어 떠나면서 절구를 멀리서 보내노라 一見大作可槪其人臨行遙贈一絶). (이광려의 시에 차운해서 답하다 次韻答李匡廬). (여름날 죽림정사에 모여 夏日會竹林精舍). (가을날 앞 시의 운으로 시를 지어 하사 오영하에게 보내다 秋日用前韻寄吳河 永河). (안일인이 시를 지어보냈기에 차운하였다 次安晩人見寄之作). (은고부를 애도하며 哀殷古阜). (백운동에서 학이 나는 것을보고 白雲洞見白鶴翎有作). (차나무 한 그루를 얻고 借分一株又疊). (만소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창암에서 비오는 밤에 자면서 訪晩蘇不遇留宿蒼巖夜雨). (운주루에서 수사 심공 낙신의 시 두 수에 화운하다 運籌樓陪水使沈公樂臣同賦)등을 지음.

* 진도 사람 우당(愚堂)이 일지암을 방문해서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庵序)''''를 써서 초의에게 증정함.

1840년(庚子. 憲宗 6년) [55세]

* 김정희 봄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됨. 6월,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됨.

* 가을, 초의 (봄날에 유산이 시 한 수를 지어보냈기에 삼가 화답하다 春日酉山見寄一絶奉和答之)를 지음.

* 초의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禪師)''''라는 사호(賜號)를 받음.(경자년 2월 초10일)

* 7월, 김정희. 김홍근(金弘根)의 소(疏)를 받음. 8월, 예산으로 귀향함. 8월 20일, 예산지(禮山池)에서 밤에 관원들에게 붙잡힘.

* 9월, 김정희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되어 안치됨.

* 허련, 김정희를 따라 예산으로 내려갔다가 김정희가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자 강경포(江景浦)에서 배를 타고 귀향함.

1841년(辛丑. 憲宗 7년) [56세]

* 초의 (임강선 臨江仙). (임금님의 ''''영신월''''시에 삼가 화운하다 奉和御題詠新月). (''''영신월''''시의 운으로 시를 지어 수사 심공에게 드리다 用前韻奉呈水使沈公). (부채를 보내 준 수사에게 감사하며 謝水使惠送節扇). (차운하여 편지로써 수사 심공에게 보내다 次韻奉柬水使沈公). (조정으로 돌아가는 수사를 전별하면서 奉餞水使還朝) 등을 지음.

* 2월, 허련 일지암을 방문함. 허련 초의의 서신을 가지고 제주도 대정에 있는 김정희를 찾아감.

* 4월 13일, 초의 ''''대둔사비로전상량문(大芚寺毘盧殿上樑文)''''을 지음.

* 김정희 제주도에서 ''''일로향실(一爐香室)''''를 써서 초의에게 보냄.

* 4월, 김정희 구암사(龜岩寺)의 백파선사에게 ''''망증15조(妄證十五條)''''를 보냄.

* 신헌(申櫶) ''''대광명전(大光明殿)'''' 현판을 씀.

1842년(壬寅. 憲宗 8년) [57세]

* 초의 (처사 서상군만사 處士 徐尙君挽詞)를 지음.

* 연천거사 홍석주 별세.

* 김정희의 부인인 예안이씨(禮安李氏) 별세. 김정희 부인을 애도하는 시 {사람을 보내 옥황상제께 하소연할 수 있다면, 내세에는 지위가 바뀌어 다시 태어나기를. 천리 밖 떨어진 곳에서 내가 죽고 그대 산다면, 그대 나의 마음 속 슬픔알게 되리라 可使上人訴冥王 來世換作易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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